美 연수 중 만난 연로한 기업 대표
정재승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미국 서부에선 처음 살아보는 데다 딸 셋이 미국에서 학교생활을 처음 해보는지라 가족 모두 긴장하며 출발했다. 우리 애들은 사교육을 전혀 받아본 적이 없어 영어도 잘 못했기 때문에 도착하자마자 미국 공립 초등학교 생활을 하는 것이 아무래도 걱정이 컸다. 하지만 나는 그간 한국에서 너무 바쁘게 살아와서 그런지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연구년이 설렘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현실적 걱정은 오히려 내게 찾아왔다. 등하교 시간에 학교 버스가 운영되지 않는 곳이라 부모가 매일 차로 자녀의 등하교를 함께해주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침에 데려다 주는 것도 힘들었지만, 오후 3시 무렵에 데리러 가는 것이 고역이었다. 중요한 세미나를 놓치거나, 연구실에서 집중해 논문을 읽는 데 방해가 됐다.
볕 좋은 봄날, 미 캘리포니아로 연수를 오신 한 기업 대표의 한마디가 내 남은 시간들을 밝게 만들어주셨다. 그분과 우연히 차를 함께 타게 되어 대화를 나누면서 나도 모르게 푸념이 터져 나왔더랬다. “안식년이라 밀린 연구를 많이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애들 데려다 주느라 방해가 많네요. ‘라이드 인생’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좀 알겠네요, 에휴.”
그러자 연세가 일흔 가까이 되신 어르신께서 내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이 시간을 많이 즐기세요. 나이가 들어 인생을 되돌아보면, 애들 학교 데려다주던 시간들이 가장 소중한 때였다고 느낄 테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일상에서 놓치고 있던 것들을 깨닫게 해준 말씀이었기에, 평범하지만 묵직한 한마디였다. ‘아, 다시 오지 않을 시간들이었겠구나!’
그날부터 등하교를 함께하는 동안 생활이 완전히 바뀌었다. 학교생활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나의 학창 시절 얘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야구 글러브와 방망이를 사서 공원에서 야구를 하기도 했고, 하굣길에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기도 했다. 내가 지금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날마다 인식하며 이 시간들을 즐겼다.
정재승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