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주인공 늙은 대학교수는 자문한다. ‘남자들은 왜 술, 담배를 즐겨 할까? 그것은 결국 남자가 여자보다 외롭기 때문이 아닐까? 어떤 짐승들은 암컷이 죽으면 수컷이 먹이도 안 먹고 슬피 울다 따라 죽는다는데 죽음보다 무서운 외로움 때문이 아닐까?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오래 사는 것도 결국은 외로움의 고통을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수꽃게도 가을을 엄청 탄다. 차가워진 바다 물결이 사그랑사그랑 주름질 때가 바로 그 시기다. 슬슬 나부대기 시작한다. 울렁울렁 바람이 난다. 발정 난 수캐가 따로 없다. 암컷을 찾아 미친 듯이 쏘다닌다. 그러다가 덜컥 그물에 걸린다.
가을 암꽃게는 만사가 심드렁하다. 잘 움직이지 않는다. 껍데기를 벗고 한자리에 다소곳이 엎드려 ‘그분(수컷)’을 기다린다. 겨울잠을 자려면 등배딱지를 두껍게 해야 한다. 그렇게 몸을 추스르고 힘을 비축한다. 그 힘으로 봄에 몸을 풀러 연안으로 나간다. 봄 수꽃게는 나른하다. 한곳에 붙박이로 처박혀 있다.
수꽃게는 단연 가을에 살이 통통하고 차지다. 쫀득쫀득 달착지근하다. 봄엔 알이 석류알처럼 꽉 찬 암컷이 으뜸이다. 가을 암컷은 알을 낳은 뒤라 살이 푸석하다. 암컷은 등딱지가 어두운 갈색이고, 수컷은 초록빛을 띤 짙은 갈색이다. 배딱지는 암컷이 둥글고, 수컷은 삼각모양으로 뾰족하다.
요즘 인천이나 충남 태안 앞바다는 꽃게천지다. 꽃게를 고를 땐 우선 들어봐서 묵직해야 한다. 암컷은 수컷에 비해 가볍다. 손가락으로 눌러 봤을 때 단단하고 물이 나지 않아야 한다. 다리 10개가 모두 붙어있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게는 천연조미료다. 무슨 요리를 해도 깊은 맛, 곰삭은 맛, 감칠맛이 난다. 게장의 곤곤한 맛이 그렇고, 꽃게탕의 매콤새콤한 맛이 그렇다. 게 속에는 조미료의 주성분인 글루탐산이 들어있다.
꽃게 등딱지는 영락없는 아버지의 넓은 등짝이다. 거친 세파와 엄동설한 눈보라를 막아주던 넉넉한 등판. 아버지는 늘 가족사진 밖에 있다. 그렇게 보일 듯 말 듯 식구들을 챙긴다.
‘내 별명은 밥도둑이다. 등딱지는/열 번 넘게 주조鑄造한 이각반합二角飯盒이다./…내 등딱지를 통해 철통밥그릇을 배워라./밥그릇은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큰 그릇이 되려면 지금의 그릇은 버려라./묵은 밥그릇마저 잘게 부숴 먹어라./언제든 최선을 다해 게거품을 물어라./옆걸음과 뒷걸음질이 진보를 낳는다.’(이정록의 ‘간장게장’에서)
게(Crab)는 흔히 무장공자(無腸公子)라고 부른다. ‘창자 없는 신사’라는 뜻이다. 평생 창자 끊어지는 아픔을 모르고 사니 얼마나 좋을까. 횡행개사(橫行介士)라는 칭호도 있다. 용왕님 앞에서도 기개 있게 옆걸음질 치는 무사라는 것이다. 게의 딱딱한 껍데기는 갑옷, 뾰족한 집게는 창을 상징한다. 꽃게는 다른 게에 비해 헤엄을 잘 친다. 그래서 영어 이름이 스위밍 크랩(swimming crab)이다.
그렇다. 가을날 수컷들은 도무지 속이 없다. ‘창자 없는’ 철부지다.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처럼 철딱서니가 없다. 언제 ‘어물전의 꽃게 두름’이 될지 아슬아슬하다. 거품을 뽀글뽀글 내뱉으며 일렬종대로 묶인 수꽃게들. 정말 죽음보다 외로움이 더 무서웠을까?
‘귀뚜리 울음소리 바지로 꿰고/기러기 울음소리 웃옷을 입고,/흰 구름의 벙거지 머리에 쓰고/또 떠나가네 또 떠나 떠나서 가네.’(서정주의 ‘이 가을에 오신 손님’에서)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