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녀’의 한 장면.
#1. 얼마 전 만난 대기업 인사담당 차장은 “달걀귀신보다 무서운 게 신입사원”이라고 말했다. 20여 년 전 신입사원 시절의 자신은 “이번이 선배께서 제게 내리시는 일곱 번째 잔입니다”라며 직장상사가 주는 술잔의 숫자까지 세어가는 말도 안 되는 아부를 해가며 다음 날 오전 3시까지 싫은 술을 받아먹었건만, 요즘 신세대 사원들이 하는 ‘짓’을 보면 열불이 난다는 것이다.
“저녁에 술 한잔하자”고 하면 “저 술 못 먹는데요. 평일 점심이 어떠신지요” 하며 잘라 거절하는 건 ‘양반’에 속한다. 점심 먹자고 해도 “저 약속 있는데요” “다이어트 중인데요” “속이 안 좋아서…” 하면서 ‘나 너랑 밥 먹기 싫어’ 하는 티를 대놓고 낸다. 입사면접에선 “이 한 목숨 회사를 위해 바치겠습니다” “야근과 주말근무 가능합니다. 아니, 하고 싶습니다” “저의 유일한 단점은 지나치게 인내심이 많아 손해를 보는 일이 많다는 점과 완벽주의를 지향하는 바람에 스스로를 피곤하게 만든다는 점입니다”라는 입발림으로 잘 보이려 안달복달하던 자들이 입사 1년만 지나면 “이 회사의 비전은 저와 맞지 않습니다”라는 한마디를 남긴 채 스스로를 뭔가 멋있게 생각하며 산뜻하게 사표를 던지는 싸가지 없는 모습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란다.
최근 ‘마녀’(9월 11일 개봉)란 영화를 보면서 나는 이 대기업 차장이 퍼뜩 떠올랐다. 여성 신입사원 ‘세영’이 팀장에게 사사건건 말대답하며 따지고 드는데, 알고 보니 세영은 애정결핍 트라우마가 뼛속까지 새겨진 사이코패스 마녀였다는 무시무시한 내용을 담은 영화. 일견 공포 장르인 듯하지만 한 꺼풀 들여다보면 ‘존재 자체가 공포’인 요즘 신입사원들에 대한 살 떨리는 메타포(은유)로도 보이는 것이다.
하긴, “팀장님, 그 반지 진짜 안 어울려요”란 직격탄을 회의시간에 대놓고 던지는 영화 속 신입사원이나, “회식하자”는 직장상사의 제안에 대뜸 “한우로요!”라고 소리치는 요즘 신입사원이나 크게 다를 게 뭐가 있단 말인가. 그렇다. 별나라에서 온 이 시대 신입사원들은 이제 공포영화의 소재로까지 모셔질 만큼 무시무시한 존재인 것이다.
#2. 미국의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한 지독하게 쓸쓸하고 폭력적이고 감각적인 영화 ‘씬 시티’의 속편 ‘씬 시티: 다크히어로의 부활’(9월 11일 개봉)은 기대의 반에도 못 미친 졸작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팜파탈로 등장하는 뇌쇄적 여배우 에바 그린이 근육질 마초들을 유혹하며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는 매혹적인 비수가 되어 고개 숙인 중년남자들의 심장에 와 꽂힌다.
일단 “여자가 옷을 벗는다. 크리스마스 선물 포장지가 벗겨지는 것처럼” 같은 내레이션부터가 저질스러우면서 예술적이다. 특히 영화에서 얼굴만큼이나 젖가슴을 자주 드러내는 에바 그린이 침대에서 내뱉는 이 대사는 마초들이 미녀에게 품는 판타지를 200% 채워주고도 남음이 있다. “날 사랑할 수 없다면, 내게 상처를 줘. 날 용서할 수 없다면, 내게 벌을 줘.”
세상에! 수컷의 심장을 이토록 쿵쾅거리게 만드는 멘트가 또 있단 말인가. 만날 아내에게 용서받고 벌 받으며 사는 남편들의 핏줄 속에 참으로 오랫동안 구겨져 있던 사디즘적 본능이 일깨워지는 순간이 아닌가 말이다. 아, 상처주고 싶어! 벌주고 싶어!
남성들이여. 그러나 오해 마시길. 영화 속 에바 그린은 결국 본색을 드러낸다는 사실. 이 세상 수컷들을 모조리 유혹해 이용해먹은 그녀는 “나를 원한다면 남자답게 굴란 말이야”라는 외마디와 함께 남자의 머리에 총알을 박는 것이다. 영화 속 내레이션대로 그녀는 여신(goddess)이 아니라 마녀(witch)이자 포식자(predator)였던 것이다. 으헝!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