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훈 시장의 노들섬 계획, 전면 재검토 이후 시간만 끌어온 ‘상상력 빈곤’ 파리는 문화 인프라 확충해 세계 제1의 도시로 등극 이념과 ‘책임 미루기’로는 서울 위상 못 올릴 것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노들섬 개발은 오세훈 전임 서울시장의 정책이었다. 그는 노들섬에 복합 문화시설을 세우기로 하고 오페라하우스 등의 건축 설계까지 마쳤다. 하지만 2011년 10월 박 시장 취임 이후 계획은 중단됐다. 오 전 시장은 얼마 전 “밤잠 안 자며 추진해온 자식 같은 정책들이 줄줄이 제동이 걸리는 것을 보고 생병을 앓았다”고 토로했다. 노들섬 계획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잘못된 정책은 늦었더라도 바로잡고 넘어가야 한다. 하지만 전임자의 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부정한다면 지도자로서 자격 미달이다. ‘승계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가리는 안목과 처리 방식에서 지도자의 능력과 포용력, 리더십이 오롯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의미 있는 곳이다. 노들섬은 ‘노들나루’, 한문 이름으로는 노량진이 있던 곳으로 서울 남쪽으로 통하는 길목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은 노량진에 대해 많은 기록을 남겼다. 정조실록에는 ‘강의 흐름이 평온하고 강폭도 뚝섬과 서빙고의 3분의 1이어서 나룻길 중 으뜸’이라고 적었다. 영조실록에는 ‘임금이 노량진에서 군사들을 사열했다’고 기록했다. 노들섬은 서울을 대표하는 교통과 군사 요충지였다. 수많은 사연이 깃들어 있는 이곳을 방치하지 말고 문화적 용도로 활용하자는 아이디어는 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현재 노들섬은 박 시장의 지시에 따라 ‘텃밭’으로 쓰이고 있다. 한동안 전문가 포럼을 만들어 활용 방안을 논의한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요즘은 시민 아이디어를 공모 중이라고 한다. ‘회의 중’이라는 간판을 3년 가까이 걸어놓았으나 진전된 것은 없다. 최종 결정권자인 시장이 판단을 미루고 ‘전문가 포럼’이나 ‘시민’을 내세워 마냥 시간을 끄는 것이 ‘박원순 식 행정’으로 굳어진다면 심각한 일이다.
최근 서울시 내부에서 노들섬에 오페라하우스 대신 작은 공연장을 만드는 방안이 제시됐다. 특정 계층을 위한 시설은 안 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반대로 해석하면 전임 시장이 추진한 문화시설은 부유계층을 위한 것이어서 백지화했다는 얘기다. 그래서 대안으로 고작 생각해낸 것이 ‘텃밭’이고 ‘작은 공연장’이라면 박 시장에겐 나라는 물론이고 서울시를 이끌 리더십도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프랑스의 첫 좌파 대통령인 프랑수아 미테랑은 1981년 취임 직후 파리 시내에 ‘그랑 프로제(큰 계획)’라는 문화시설 확충 계획을 세웠다. 오늘날 관광 명소가 된 오르세 미술관, 바스티유 오페라극장, 루브르 박물관의 피라미드 등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미테랑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반발했다. 사치스러운 극장이나 박물관 대신에 서민주택이나 빨리 지으라고 요구했다. 미테랑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헬리콥터를 동원해 유유히 파리 상공에 올라가 어느 곳에 문화시설을 세워야 할지 골몰했다.
최근 중국의 ‘빅뱅’과 더불어 서울이 문화와 관광의 중심지로 위상을 확고히 하는 일이 향후 우리의 활로 중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지금까지 박 시장이 보여준 상상력과 추진력으로는 서울의 획기적 변신을 기대하기 힘들다. 지도자가 지닌 ‘그릇의 크기’로 미테랑과 박 시장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지 모른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