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리꽃
―천수호(1964∼ )
여덟 살 때 나리꽃 화신을 본 적 있다
바위 뒤에 숨어서
긴 머리카락으로 맨몸을 가리고 있던 나리꽃
옷가방을 갖다달라던
암술이 긴 속눈썹
손에 꼭 쥐여 주던 쪽지도 나는 계곡으로 던져버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음박질쳤는데
그 쪽지는 급물살 타고 아득히 멀어져갔는데
사십 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옷을 달라고 속눈썹 깜빡이는 여자
그 바위 뒤에서 벌거벗은 채
마흔 번의 겨울을 어찌 다 견뎠는지
늙지도, 죽지도 않고
그 붉은 루즈도 닦지 않고
붉은 입술에 섬처럼 떠올라 초조한
내가 처음 본 여자의 몸, 나리꽃 화신
‘수남이 엄마, 모든 걸 용서하오. 속히 돌아오오.’ ‘영숙 엄마, 다 해결했으니 속히 돌아오오, 애들이 기다리고 있소.’ 어째 여자를 찾는 글만 떠오른다. 그것도 잘못한 쪽인 것 같은 여자들만. 여자가 도망갈 정도로 나쁜 남자들은 그만한 정성이 없기 때문이리라.
이 산 저 산, 나리꽃이 난만한 아름다운 계절에 아름다운 나이인 여인이 ‘바위 뒤에 숨어서/긴 머리카락으로 맨몸을 가리고’ 떨고 있다. 도망가려다 들켜서 심한 봉변을 당한 게다. 오죽하면 발가벗겨진 채 뛰쳐나가 산에 숨었을까. 다행히 어린 소녀를 만나 도움을 청했지만, 소녀는 혼비백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난다.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