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용 기자
집값 급등기였던 2000년대 초반, 많은 부동산 전문가들은 집을 투자 대상으로 봤다. 그때도 실수요론은 있었지만 변죽만 울렸다. 집값이 급등하고 정부가 집값 잡기에 나선 2000년대 중반 “가격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주거를 위해 집을 사라”는 실수요론이 힘을 얻었다. 집을 보는 관점이 변하면서 집을 사는 주된 목적이 달라졌고 실수요자의 실체도 모호해졌다.
우왕좌왕하는 실수요론은 셋방살이 그만하고 ‘내 집’에 정착하려는 진짜 실수요자를 혼란에 빠뜨린다. 무엇보다 적정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애매해진다. ‘집값이 오르든 내리든 그냥 눌러앉아 살면 되지 않느냐’는 주먹구구식 논리가 실수요론인 양 포장돼 수요자들의 눈을 가리기 때문이다.
거품이 잔뜩 낀 집을 사면 후폭풍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특히 이자율 후폭풍은 두렵다. 지금은 초저금리 상황이지만 향후 몇 년 내 이자율이 급등하면 재앙이 된다. 집을 살 수 있는 구매력이 줄어들면서 집값이 급락할 수 있어서다. 변동금리로 대출받아 집을 산 실수요자들은 집을 팔아 파산을 막아야 하는 상황에 몰릴 것이다.
따라서 실수요자라도 가격에 민감해야 한다. 냉장고를 사는 사람은 모두 실수요 목적이지만 너무 비싼 값을 치르고 냉장고를 장만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 적정가로 사는 것이 목표가 돼야 한다.
집에도 이 적정 가격을 판단하는 기준이 있다. 증시의 주가수익비율(PER)이라는 개념을 약간 변형해 이용하는 것이다. PER는 주가를 1주당 이익으로 나눠서 계산한다. 개별 주식의 PER가 시장 평균보다 높으면 해당 주가가 고평가돼 있다는 것이고 시장 평균보다 낮으면 저평가돼 있다는 의미다.
주택의 PER는 1m²당 매매가를 1m²당 연간 월세로 나눠서 구한다. 이때의 연간 월세는 보증금 없는 순수한 월세를 말한다. 국내 임대차시장에는 보증금 없이 월세만으로 계약하는 사례가 거의 없지만 집을 산 뒤 얻을 수 있는 연간 이익의 규모를 어림잡아 알기 위해 가상의 숫자를 뽑아 보자.
예를 들어 서울 은평구 아파트 1m²당 매매가는 353만 원, 1m²당 연간 월세는 17만3000원(1m²당 전세시세 240만 원×은평구 월세전환율 7.2%)이다. 이 매매가를 연간 월세로 나눈 20.4배가 은평구 아파트의 기준 PER가 된다. 기준 PER를 파악했다면 이를 자신이 매입하려는 아파트의 PER와 비교해보라. 현재 매물로 나와 있는 은평구 A아파트 1m²당 매매가는 443만 원, 1m²당 연간 월세는 26만4000원이다. 매매가를 월세로 나눈 PER가 16.8배로 기준 PER(20.4배)보다 낮다. 수익률 측면에서 매입을 고려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이런 식으로 계산한 서울 지역별 아파트 PER는 △강남구 27.6배 △용산구 22.4배 △영등포구 19.9배 △노원구 18.6배 등이다. PER가 이 수준 이하인 아파트가 가격 면에서 매력적이다. 이런 가격 비교 결과를 주택 매입의 출발점으로 삼으면 된다. 이후 주거환경, 학군, 편의시설 등 주관적인 기준을 감안해 실제 매입 여부를 결정하라.
최근 서울 강남의 노른자위 땅인 한국전력 터를 감정가의 3.2배인 10조5500억 원에 매입한 현대자동차는 실수요자였다. 많은 사람들이 비싸게 샀다고 생각한다. 현대차는 한전 땅을 너무 사고 싶어서 마음이 급했을 것이다. 그래도 현대차가 이 대금을 감당할 수 있는 건 연간 9조 원의 순이익을 내는 초우량 기업이어서이리라. 실수요자 현대차에 배울 점은 ‘분위기에 휘둘리지 말라’이다.
지금 집주인들은 다소 느긋한 반면 집을 사려는 수요자는 조급해 보인다. 특히 집을 고를 여유가 많았던 상반기에 기회를 놓친 사람은 더 급할 것이다. 그래도 돌아가라. ‘난 실수요자니까’ 하며 적정가 이상의 매물을 덥석 잡으려는 스스로를 제어하라. 우리는 마이너스 가계부를 안고 살아야 하는 ‘작은 손’임을 잊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