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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 대신 그래픽 디스플레이… 조각상 대신 로봇… 예술과 과학, 경계선상의 실험

입력 | 2014-10-07 03:00:00

서울대미술관-스위스연방공대 DAW ‘하이브리드 하이라이트’ 전




배재혁 씨의 ‘인사이드 아웃’은 일상적 기계장치의 미학적 해석을 도모한 작업이다. 정밀하게 계산하고 재단해낸 투명 톱니바퀴의 실루엣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예술인가’ 자문하게 만든다. 서울대미술관 제공

예술을 ‘인간이 지닌 유희적 욕구의 발현’으로 본 영국 동물학자 데즈먼드 모리스는 저서 ‘예술적 원숭이’에서 8가지 미술의 법칙 중 하나로 ‘네오필리아(neophilia)의 법칙’을 제시했다. 새것을 선호하는 인간의 성향이 예술을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8일∼12월 7일 서울대미술관에서 열리는 ‘하이브리드 하이라이트―스위스와 한국: 예술-인간-과학’전은 네오필리아의 법칙이 예술 현장에서 어떤 양상으로 드러나는지 보여준다. 공동 기획주체는 스위스연방공대 디지털아트위크(DAW). 2005년 창설한 DAW는 해마다 페스티벌을 열어 예술과 과학의 경계선 위에서 벌어지는 실험을 꾸준히 소개해 왔다.

막바지 준비에 한창인 5일 밤 찾아간 전시장의 모습은 1980년대 서울 어린이회관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캔버스나 조각상은 찾아볼 수 없다. 관람객의 움직임에 감응하는 컴퓨터그래픽 디스플레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로봇, 아이패드 게임, 탄성 케이블에 줄지어 매달린 음향발생기…. 예술인 듯 예술이 아닌 것 같기도. 모리스가 기대했던 “막다른 길에 이른 기존 트렌드에 구애받지 않는 새로운 독자적 시각”만은 분명 차고 넘친다.

김현주 씨의 ‘로봇 공생’. 똑같은 외형의 로봇 5대가 상이한 움직임의 ‘인격’을 보여준다.

‘로봇 공생’이라는 작품을 선보인 김현주 씨는 반구형 투명플라스틱을 뒤집어쓴 소형 로봇들을 강아지 달래듯 분주히 점검하고 있었다. 전시장 바닥에 불룩 돌출한 모양으로 설치한 5개의 석고 영사막에 눈, 입술, 목젖 등 신체 여러 부위를 근접 촬영한 이미지를 비춰 배경으로 삼았다. 그 인체 이미지의 섬 사이사이를 로봇 5대가 저마다의 행동양식에 따라 배회한다. 포스텍(포항공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뒤 유학길에 미디어아트로 옮겨간 김 씨는 “차츰 인간을 닮아가는 기계가 어떻게 인류와의 공생을 모색하는지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배재혁 씨의 ‘인사이드 아웃’은 입력 변수에 따라 다채로운 구성의 움직이는 톱니 조각을 디자인할 수 있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뼈대로 삼았다. 전시장에는 선택한 결과물을 레이저로 재단한 투명 아크릴 톱니바퀴가 돌아간다. 작가는 움직이는 조각마다 조명을 비춰 벽면에 커다란 톱니 그림자를 엮었다. 작가가 내놓은 작업의 고갱이는 관람객 눈앞에 놓인 움직이는 그림자일까, 아니면 컴퓨터 디자인 프로그램일까. 배 씨는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석사과정을 마친 뒤 역시 유학 중 진로를 바꿨다.

스위스 작가 나데즈다 스보로바의 ‘오코’. 위성에서 찍은 지구의 이미지를 사용자가 재구성하는 게임이다.

바로 옆 전시실에는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아이패드 10여 대를 늘어놓았다. 게임프로그래머 10개 팀이 예술과의 접점 찾기를 시도한 신작을 체험하도록 했다. 터틀 크림(박선용 박영민 씨)의 ‘The Watcher’는 ‘게임은 손으로 조작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거스른다. 스크린에 자그마한 외계생명체가 나타나 오물조물 우주선을 만들기 시작한다. 습관대로 화면을 만지는 순간 게임이 끝나 첫 화면으로 돌아간다. 개발자는 “손을 뻗고픈 충동을 억제하며 지켜봐야 끝나는 게임이다. 컴퓨터게임의 주체가 어느 쪽인지 돌아보려는 의도”라고 했다.

노정민 학예연구사는 “38명의 참여 작가는 각자의 방식으로 예술과 과학의 기존 가치관과 관념에 도전했다”며 “우연성으로 빚어진 모호한 비합리적 요소가 어떻게 새로운 영역을 확장시키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1일과 11월 8, 15일에는 ‘과학에서의 신경미학’ ‘융합하는 문화’ 등을 주제로 한 이노베이션 포럼이 열린다. 02-880-9504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