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평인 논설위원
교학사 교과서의 사실상 실패는 안타까운 일이다. 좌파 역사학계의 공격이 다양성 확보라는 검정체제의 취지를 거스르는 부당한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그렇다고 좌파 역사학계만 탓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교학사 교과서가 적지 않은 결함으로 공격의 빌미를 제공한 것도 사실이다. 앞으로라도 최대한 결함이 적은 교과서를 만들어 극복하는 수밖에 없다.
박근혜 정부가 앞뒤 재보지도 않고 덜컥 한국사를 필수화 해놓고 마땅한 교과서가 없으니까 이제 검정을 국정으로 바꾸려고 한다. 이 정부는 국정화를 하면 교학사 교과서 실패를 뛰어넘는 최종적 승리를 얻는다고 여길지 모르겠다. 그러나 누구나 알다시피 다음 정권이 그것을 뒤집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한 그 승리는 결코 승리가 될 수 없다.
좌파 역사학계는 오랫동안 이런 진지전에 공을 들였다. 그들의 토대를 마련해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박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박 전 대통령이 민족정신을 강화한다며 국사를 필수화하면서 역사 전공자를 위한 많은 자리가 만들어졌다. 그런 자리가 나중에 야금야금 ‘해방전후사의 인식’류의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들 차지가 됐다.
오랜 기간에 걸쳐 빼앗긴 것을 다시 빼앗아 오려면 역시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교과서를 둘러싼 싸움은 단기간만 내다봐서는 안 된다. 박 대통령이 임기 내에 이 싸움을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진지전의 승리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대통령 퇴임 후에도 필생의 임무로 여기고 할 생각이 있다면, 그렇다면 해보라.
내 책꽂이에는 1996년 김영삼 정부에서 발간된 한국사 국정교과서가 있다. 한국사 국정교과서는 이후로는 새로 나오지 않았다. 한국사 국정교과서를 검정교과서로 바꾸는 결정은 김영삼 정부가 내렸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그 결정을 번복하지 않고 따랐을 뿐이다.
우파 정부가 채택한 정책이 좌파 정부에서 번복되지 않고 이어질 때, 또 좌파 정부가 채택한 정책이 우파 정부에서 번복되지 않고 계속 이어질 때 그런 것을 합의라고 부른다. 한국사 교과서 검정화는 교육정책에서 보기 드문 합의의 사례다.
민주주의 사회에 하나의 올바른 역사는 없다. 하나의 올바른 역사, 즉 정사(正史)는 엄격히 말해 왕조시대에나 가능하다. 대한민국의 건국과 발전을 긍정하는 한국사 교과서가 사실상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국정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검정체제의 합의를 통해 이룩한 진보를 되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