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기억 없애거나 바꾸는 ‘브레인 모듈레이션’ 연구 활발
《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우리는 왜 여기 있는 거지?” 최근 개봉한 영화 ‘메이즈 러너(The Maze Runner)’는 모든 기억이 지워진 소년들이 거대한 미로에서 출구를 찾아 헤매는 이야기다. 영화 제목처럼 소년들은 출구를 찾아 달리고 또 달린다. 마치 미로에 갇힌 실험쥐처럼. 사람의 기억을 지운다는 설정은 너무 앞서간 영화적 상상력일까. 뇌 과학자들은 이미 기억을 지우고 감정을 바꿀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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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메이즈 러너’의 주인공은 모든 기억이 지워진 채 거대한 미로가 가로막고 있는 미지의 공간에 갇힌다. 실제로 미국 MIT 연구진은 쥐의 뇌에 광섬유를 삽입해 빛으로 신경세포를 자극하는 방식으로 기억을 조작하는 데성공했다(위 사진). 이십세기폭스코리아·MIT 제공
에드워드 멜로니 미국 하버드대 의대 교수팀은 실험쥐의 기억을 의도적으로 지우는 실험에 성공해 8월 미국 공공과학도서관 학술지 ‘플로스원’에 발표했다. 쥐가 특정 장소에 갈 때마다 연구진은 쥐의 다리에 전기 충격을 가했고, 이후 쥐는 그 장소에 갈 때마다 몸이 경직되는 공포 반응을 보였다.
도네가와 스스무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팀은 뇌를 조작해 감정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연구진은 우선 수컷 쥐에 전기 충격을 줬다. 이때 뇌의 편도체와 해마에 있는 신경세포가 활성화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연구진은 이후 쥐의 두개골에 구멍을 뚫어 이 신경세포로 빛을 전달할 수 있는 광섬유를 심었다. 그리고 광섬유로 빛을 쪼여 신경세포를 자극하면서 암컷과 교미하도록 했다. 놀랍게도 수컷 쥐는 교미가 끝난 뒤 전기 충격을 당한 장소에서도 전혀 움츠러들지 않고 자유롭게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전기 충격의 고통이 빛으로 인해 행복한 감정으로 바뀐 셈이다.
정용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는 “최근 뇌 기억을 지우거나 바꾸는 ‘브레인 모듈레이션(Brain Modulation)’ 연구가 활발하다”면서 “이를 이용하면 외상후스트레스장애 환자를 위한 새로운 치료법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기억 비밀 풀려면 ‘신경세포 지도’ 있어야
이 때문에 최근 뇌 과학자들은 뇌 속 신경세포가 서로 어떻게 연결됐는지 지도를 그리는 연구를 진행 중이다. 한국계 미국인 서배스천 승(승현준) MIT 교수는 신경세포의 구조 전체를 일컫는 ‘커넥톰(Connectome)’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새로운 경험을 할 때마다 커넥톰이 바뀌고 이 과정에서 기억이 생성되고 저장된다고 주장한다.
김진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기능커네토믹스연구단 책임연구원은 “기억이 저장되는 과정의 핵심이 신경세포 자체인지 신경세포들 간의 상호작용인지에 대해서도 학계에서는 의견이 분분하다”면서 “신경세포 지도를 완성하면 이런 논란에 대한 답이 어느 정도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최영준 동아사이언스 기자 jxabb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