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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태 한국교통대 초빙교수· 前 주라오스 대사
모든 국민의 문자해독력을 높이기 위해 한글전용 정책을 펼침으로써 문맹자가 거의 없도록 한 것이 산업화나 민주화에 크게 기여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다만 30여 년간의 한글전용은 국민의 지적수준을 하향 평준화시켰고, 한자문맹으로 동아시아뿐 아니라 세계 2, 3위의 경제·문화 대국인 중국 일본과의 지적교류에 지장을 주고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이는 한글전용으로 우리말과 우리글이 이전에 없었던 혼란을 겪고 있으며, 언어생활의 품격 까지 떨어뜨리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글전용, 즉 한자교육 폐지에서 비롯된 신문, 방송, 국가공용표지의 오기와 오용의 실례를 들어보자(참고로 필자는 J일보를 구독하고 있음을 밝힌다).
방송자막에도 오기가 많다. 내란선동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는 이석기 의원의 자택을 수색할 때 거실에 걸린 액자를 소개하며 김일성 김정일 부자가 좋아했다는 '以民僞天'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위'라는 글씨는 '거짓'이라는 뜻의 '僞'가 아니라 '삼다'는 뜻의 '爲'가 맞다. 사람인변(亻)이 들어간 한자를 사용함으로써 '백성을 하늘로 삼다'라는 뜻이 '백성으로 하늘을 속이다'가 되어버렸다.
배임수뢰죄를 거듭해서 '배임수죄죄'라고 하는 것을 보면 '뇌물을 받다'라는 뜻의 '수뢰'라는 말을 모르는 것이 확실하다. 또 '매년마다'라든가, '추가여죄'를 조사 중이라든가, '기념식수를 심었다'라는 방송언어는 잘못된 것이다. '매년'에는 '마다'라는 뜻이, '여죄'에는 '추가'라는 뜻이, '식수'에는 '심었다'는 뜻이 이미 들어가 있다. 이런 식으로 쓰다 보면 '식사밥을 먹었다'는 말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하기야 '낙숫물이 떨어진다'는 세상이니까.
국립공원이나 문화재 안내판 표지가 오자투성이인 것은 민망하다. 봉수대의 수(燧)자에서 불화변(火)이 빠지고, 화엄사(華嚴寺)를 안내하는 대형교통표지판에 사람인변(亻)이 붙은 '儼'자를 쓰고, 청량사터를 뜻하는 '청량사지'에는 터 지(址)자가 그칠 지(止)로 되어 있다.
옆이나 밑에 병기한 일본어 중국어도 이에 못지않게 엉터리가 많다. 경북 영양군 두들마을은 소설가 이문열의 고향. 그의 작품이 "낙양의 지가를 올렸다"라는 고사를 인용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낙양의 낙이 낙수 낙(洛)이 아닌 떨어질 낙(落)으로 되어 있었다.
예를 들자면 한도 끝도 없지만 이를 바로잡을 시스템도 없고 문제의식도 별로 없는 것 같다. 한자어에 기초한 신문이나 방송 용어, 문화재 등 국가공공표지물의 표기를 바로잡아줄 사람들이 모두 은퇴해 버렸기 때문이다. 현직에 있는 사람만의 책임이 아니라 한 세대 이상 국한문 혼용을 버리고 한글쇼비니즘에 빠진 결과이다.
국제화 세계화시대에 표음문자인 영어를 잘 익히면 그만이고, 한글로 천하만물의 소리를 모두 표기할 수 있으니 국한문 혼용이 필요 없다는 한글전용론, 한자교육불가론에는 동의할 수 없다. 좋은말 바른말은 그 나라와 국민의 품격과 교양수준을 높인다. 나는 보수논객 조갑제 씨의 지나친 대북강경론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그러나 박정희 숭배자인 그가 지적한 박정희의 두 가지 큰 실책에는 동의한다. 한자교육 폐지와 고교평준화다. 북한에 뒤질까봐 실행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한글 전용으로 우리국민의 언어품격이 높아지고, 한글로 된 서책으로 교육받은 세대들의 지적수준이 높아졌는가?
10여 년 전 국격(國格)이라는 한자말을 조어한 사람으로서 국한문 혼용이 한국어의 품격을 높일 것임을 확신한다.
정화태 한국교통대 초빙교수· 前 주라오스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