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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한기흥]김정일이 말하길 “제스처보다 신의다”

입력 | 2014-10-11 03:00:00


한기흥 논설위원

2000년 10월 23일 저녁 평양 5·1경기장.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이 귀빈석에 모습을 드러내자 긴장 속에 얼어붙은 듯 미동도 않던 관중이 엄청난 박수와 함성을 일제히 터뜨렸다. 두 사람은 감격에 겨워하는 그들에게 손을 들어 답례한 뒤 나란히 앉아 노동당 창당 55주년 기념 집단체조시범을 관람했다. 숨 막히는 정적에서 폭발적인 열광으로 순식간에 바뀐 경기장 풍경이 그 무렵 절정에 올랐던 북-미 관계를 보는 듯했다.

당시 한반도엔 해빙의 기운이 넘실댔다. 10월 9일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은 북 인사론 백악관을 처음 방문한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과 양국의 적대관계 종식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이어 13일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23일 올브라이트는 클린턴의 방북 문제를 논의하러 평양을 찾았다. 북-미 수교는 시간문제인 듯했다. 그러나….

펀치로 종이를 뚫을 때 떨어지는 작은 조각인 채드(chad)가 모든 것을 바꿔 놓으리란 것을 그땐 몰랐다. 11월 7일 앨 고어(민주)와 조지 W 부시(공화)가 격돌한 미 대선은 사상 가장 치열한 접전으로 치러졌고 결국 25명의 선거인단이 걸린 플로리다 주에서 승패가 갈렸다. 그곳에선 펀치로 제대로 뚫지 못한 투표지의 효력을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5주간의 재검표 공방 끝에 부시가 극적으로 대통령이 되면서 북-미 관계는 급속 냉동됐다. 한국 정부는 미국의 대북정책이 항로를 갑자기 변경하기 힘든 항공모함과 같다고 했지만 오판이었다.

부시는 북을 결코 믿지 않았다. 클린턴 행정부가 핵 포기를 약속한 대가로 독재자 김정일에게 너무 양보했다고 봤다. 2001년 3월 김대중 대통령과의 첫 정상회담을 앞두고 부시는 참모들에게 “대북정책을 바꿀 것”이라고 말했다. 부시는 회고록에서 “그때부터 북한은 미국이 양보안을 내놓기 전에 먼저 행동을 바꿔야 했다”고 술회했다.

그는 2002년 1월 연두교서에서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 발끈한 북이 그해 10월 방북한 제임스 켈리 미 특사에게 농축우라늄 핵개발까지 시인하면서 북-미 관계를 이어주던 1994년 제네바 합의는 파탄 났다. 그 후 북은 핵실험 등 무력시위로 응수하며 미국의 정권교체를 기다렸지만 2009년 다시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북-미 관계는 온기를 되찾지 못하고 있다.

클린턴과 부시의 대북 정책 중 어느 쪽이 한반도 평화에 기여했는지는 관점에 따라 평가가 다를 것이다. 다만 오바마 역시 북에 강경한 것을 보면 더욱 심각해진 핵 미사일 인권 등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를 북이 해결하지 않는 한, 다음 대선에서 설령 힐러리가 대통령이 된들 14년 전 호시절로 되돌아가긴 어려울 것 같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대목은 클린턴 행정부가 북과 대화에 나선 것은 2000년 6월 첫 남북 정상회담 개최로 남북 관계가 개선된 데 따른 것이라는 점이다. 아니었다면 미국이 한국을 제치고 먼저 북에 손을 내밀지 않았을 것이다.

조명록과 같은 차수인 황병서 인민군 총정치국장 일행이 4일 인천을 다녀간 뒤 북이 다시 남북 대화를 디딤돌 삼아 북-미 관계 개선을 꾀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그렇다면 역사 속의 ‘그때 그 장면’을 되돌아보는 게 좋겠다. “제스처를 하기보다는 신의를 보이는 것이 필요하다.” 김정일이 올브라이트에게 한 말이다. 해법을 그리 잘 알면서 왜 실천하지 못한 것일까….

한기흥 논설위원 eligi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