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민 산업부 차장
기자도 지난 주말 망명 대열에 합류했다. 구글 플레이스토어에서 텔레그램 애플리케이션을 내려 받아 설치한 뒤 가입했다. 어떻게 생긴 메신저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지인들 가운데 누가 가입했는지 보고 싶기도 했다.
가입한 지 1분 만에 한 지인이 “망명했구나!” 하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알고 보니 자신의 주소록에 있는 사람이 가입하면 스마트폰에 “○○○님이 텔레그램에 가입했습니다”라는 메시지가 오게 돼 있다. 동지의식을 은근히 자극한다.
아니면 실제로 평소에 불법 소지가 있는 대화를 주고받기 때문일 수도 있다. 텔레그램을 국내에서 가장 먼저 사용한 층은 속칭 ‘찌라시’를 주고받는 증권가 사람들로 알려져 있다. 불륜 관계인 사람들도 비밀 대화가 필요할 수 있겠다.
이 밖에 정치적 박해 때문에 진짜 망명이 필요하거나, 메신저 검열에 대한 항의 표시로 옮겨가는 경우도 있을 법하다.
스마트폰을 보니 61명이 텔레그램의 대화상대로 올라와 있었다. 이들 가운데 딱히 남의 눈을 피해 대화를 해야 할 사람도, 국가권력에 대한 항의 표시로 메신저를 바꿀 정도로 정치의식이 강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다. 텔레그램에는 다른 이용자의 최종 접속시간이 나오는데 대다수가 2, 3일 동안 한 번도 쓰지 않았다. 그냥 호기심 차원에서 깔아놓기만 한 것 같다.
국내 텔레그램 이용자는 8월까지 하루 2만 명 미만이었다. 그러다 지난달 18일 검찰이 ‘사이버 명예훼손 전담수사팀’을 신설하겠다고 밝힌 뒤 조금씩 늘기 시작했고 카카오톡이 2일 검열 대책을 발표한 뒤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날 공산이 커 보인다. 카톡 이용자가 줄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지만 크게 주목할 만한 수치는 아니다. 다음카카오에 본때를 보여주려면 카톡을 스마트폰에서 지우고 텔레그램으로 완전히 옮겨가야 하는데 대화상대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메신저의 특성상 쉽지 않다. 나만 옮겨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을 보니 글을 쓰는 동안에도 20여 명이 추가로 망명을 감행했다. 하지만 이틀이 넘는 시간 동안 기자가 텔레그램으로 한 대화는 가입 직후 몇 분에 이뤄진 게 전부였다.
다만 한 사람의 개인정보가 고작 수십 원에 거래되는 한국에서 프라이버시 문제가 다시 한 번 수면으로 떠오른 점은 바람직한 측면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사법 시스템과 프라이버시 사이의 적정한 균형점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해야 하는 시점이다.
홍석민 산업부 차장 sm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