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늦게 핀 꽃… 오래도록 코트에 향기 내뿜고 싶어”
○ 기적처럼 찾아온 금빛 환희
땀을 닦으며 다가온 조성민에게 여전히 따끈따끈한 아시아경기부터 화제로 삼았다. 조성민은 “금메달은 예상도 못했다. 대회 직전 출전한 스페인 월드컵에서 5전 전패의 수모를 당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월드컵 참패로 대표팀 전체가 ‘멘붕’에 빠졌다는 것이었다.
“‘훗날 좋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자’, ‘사랑하는 가족, 성원하는 국민을 기억하자’ 등의 얘기를 나눴다. 불안감과 의심을 없애고 서로를 믿는 계기가 됐다.”
효과가 있었던지 대표팀은 예선에서 난적 필리핀을 이기며 자신감을 키웠다. 이 경기에서 조성민은 3점슛 4개를 앞세워 17점을 터뜨렸다. 최고 명승부로 꼽힌 이란과의 결승에서도 16점을 보탰다. 당시 유재학 감독은 “조성민과 양동근 같은 선수가 없었다면 얻기 힘든 결과였다. 팀이 처져 있을 때도 가장 운동 열심히 하고 분위기를 한데 모았다”고 칭찬했다.
○ 하늘에서 기뻐하고 계실 부모님에게
환했던 조성민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세상을 뜨신) 부모님도 참 좋아하셨을 것 같다”고 말을 건넸을 때였다. 조성민은 “힘들 때는 엄마 아빠 생각이 잘 안 난다. 이번처럼 금메달을 땄거나 좋은 집으로 이사할 때처럼 행복한 순간을 맞으면 부모님께 말하고 싶고 자랑하고 싶다. 곁에 계셨으면 얼마나 기뻐하셨겠느냐”며 아쉬워했다.
시련의 연속이던 그를 잡아준 건 이젠 평생의 반려자가 된 부인 윤숙정 씨(28)다. “부모님 돌아가셨을 때는 만난 지 6개월 정도 된 여자친구였다. 그때 스무 살밖에 안 됐는데도 흔들리던 나를 잡아줘 회복에 큰 힘이 되었다.”
서울예고와 서울대 기악과를 거쳐 플루트 연주자로 활동하던 윤 씨는 TV로 농구를 보다 눈에 띈 조성민에게 호감을 갖게 된 뒤 지인의 소개를 받았다. 이들이 처음 만난 장소도 서울 잠실의 농구장이었다. 어려움을 함께 견뎌낸 이들 부부는 2012년 결혼에 골인해 내년 4월 아빠 엄마가 된다.
○ 늦게 피었지만 오래 피는 꽃
초등학교 5학년 때 농구를 시작한 조성민은 학창 시절 그 흔한 청소년대표 한 번 한 적 없는 무명이었다. 프로 신인 드래프트 8순위 출신으로 첫해 연봉은 6000만 원. “억대 연봉이 목표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 소박했던 것 같다.” 조성민은 제대 후 명장 전창진 감독이 KT 사령탑으로 부임하면서 도약의 전기를 마련했다.
조성민은 훈련 때 100개의 슈팅을 쏜다면 100%의 힘을 다해 모두 넣을 수 있도록 집중력을 높였다. 해마다 여름이면 태백에서 실시한 15km 산악달리기에서도 늘 선두권을 지키며 요령 한 번 피우지 않았다. 타고난 성실성에 감독의 맞춤형 지도가 녹아들면서 기량을 키워 나간 그는 27세 때인 2010년 뒤늦게 처음 태극마크를 달았다. 올 시즌 조성민의 연봉은 5억 원. 전창진 감독은 “계속 성장하는 선수”라고 칭찬했다. 선수의 기본 자세와 훈련 태도를 중시하는 유재학 감독은 “따로 뭘 주문할 필요가 없다. 알아서 잘한다”고 했다.
서른을 넘겨 만개한 조성민은 후배들에게 신선한 귀감이 되고 있다. “한때 난 존재감이 없었고 큰 아픔도 겪었다. 그래도 늘 기회는 올 거라 믿고 준비했다. 긍정적인 생각은 변화를 이끈다.”
P.S. 인터뷰를 마치고 며칠 뒤 조성민의 전화를 받았다. “무릎이 계속 아파 검사를 받았는데 오른쪽 무릎 연골판이 파열됐다고 한다.” 대표팀 있으면서 몇 개월째 통증을 느꼈지만 그저 무리해서 그런 줄 알고 진통 주사까지 맞아가며 참았단다. 미련하리만큼 자기 몸 돌볼 줄 모르다 그만 탈이 난 것이다. 조성민은 13일 삼성서울병원에서 수술대에 올라 최소 2개월 결장하게 됐다. 그런데도 조성민은 “내가 돌아오기만 기다렸던 감독님과 동료들에게 너무 죄송스럽다”며 안타까워했다. 당분간 그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질 것 같다.
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