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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희 칼럼]“김수환 추기경이 입학사정관이라면…”

입력 | 2014-10-14 03:00:00


정성희 논설위원

대학생 손모 씨가 날조된 스펙으로 서울 K대 한의예과에 합격한 사건을 보고 “터질 게 너무 늦게 터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 씨는 2010년 1월 영국 스웨덴에서 해외 문화체험을 했다고 했으나 중학교 시절의 가족여행을 시기만 바꿔 제출한 것이었다. 121시간의 병원 봉사활동으로 교내 봉사상을 2회 수상했으나 실제 봉사활동은 하지 않았다. 한글날 기념 전국 백일장에서 금상을 수상한 시는 현직 교사가 써 준 것이었다. 행인이 잃어버린 지갑을 찾아준 일로 선행상을 받았는데 지갑의 주인은 손 씨의 할머니였다. 이런 아이디어를 짜낸 손 씨 어머니를 ‘창의 전형’으로 뽑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이 모든 가짜 스펙의 연출은 손 씨의 어머니, 극본은 교사, 배우는 손 씨가 맡았다. 어머니는 딸의 고교 은사인 민모 교사에게 가짜 스펙을 만들어 달라며 돈을 제공했다. 완전범죄나 다름없던 이 일은 민 교사가 시험지 유출 사건으로 구속되면서 계좌에 입금된 돈을 추적하던 경찰에게 발견됐다.

단지 한 어머니의 치맛바람이나 일탈로 치부할 수 없는 입시제도의 문제점이 이번 사건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명박 정부가 ‘성적보다 잠재력과 가능성이 있는 학생’을 뽑겠다며 도입한 것이 입학사정관제다. 손 씨는 이 제도를 십분 활용했다. 입학사정관제는 내신과 대학수학능력시험 대신 다양한 활동을 통해 학생의 잠재력을 보고 선발한다는 취지로 도입됐다. 바꿔 말하면 ‘성적이 아니라 사람에 의한 선발’이다.

입학사정관제가 도입됐을 때 한 학부모가 “김수환 추기경님이 살아 돌아와 입학사정관제를 하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믿을 수 없다”고 말한 게 기억난다. 입학사정관제의 본질이 ‘신뢰’에 있음을 정확히 짚어낸 발언이다. 미국 대학의 입학사정관제가 성공한 이유는 신뢰도가 높고 입시의 자율성이 보장돼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전제조건이 없는 한국 입학사정관제는 애당초 실패의 씨앗을 품고 출발했다.

이명박 정부는 한국사회의 신뢰도를 과대평가했거나 학부모의 교육열을 과소평가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한국을 저(低)신뢰 사회로 분류한 때가 1995년이지만 지난 20년간 한국사회는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용이 될 이무기를 미리 찾아보겠다는 이 제도는 한국에서 돈 권력 정보가 있는 사람이 대학에 쉽게 들어갈 수 있는 통로로 변질됐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 할아버지의 경제력이 필요하다는 말은 이때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귤이 회수를 건너가 탱자가 된 격이다.

이번 사건 하나로 입학사정관제 전체를 매도할 필요는 없다는 주장도 나오지만 그렇게 낙관해도 될까. ‘목동 엄마’인 손 씨의 어머니가 “강남에 가면 나보다 더한 엄마가 많은데 왜 나한테만 그러느냐”고 한 말은 몰염치에서 나왔지만 입시세계에 가짜 스펙이 얼마나 만연해 있을지를 보여준다.

더 큰 문제는 대학들이 가짜 스펙을 구분해낼 능력도, 의지도 없다는 점이다. 올해 고교 3학년인 조카의 부탁을 받고 입학사정관과 함께 학생을 선발했던 교수에게 “어떻게 자소서(자기소개서)를 써야 하는가”를 물어보았다. 그 교수는 “교수 한 명이 400∼500명의 자소서를 어떻게 읽어보느냐. 다 자기 잘났다는 얘기인데…. 대충 써라”고 대답했다.

입학사정관이 읽어보지도 않을 자소서를 위해 수백만 원씩 주고 대필을 의뢰하는 현실은 정상인가. 속는 줄 알면서도 속고 속일 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신파극을 보노라니 예비고사 성적으로 대학에 갔던 전두환 시절이 차라리 그립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