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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도 아물지 않아… 세월호 유족 꼭 보듬어주길”

입력 | 2014-10-16 03:00:00

[성수대교 붕괴 20년/그날의 아픔 아직도]
희생자 가족들의 이야기




《 1994년 10월 21일. 서울 성동구와 강남구를 잇는 성수대교 일부 교량이 붕괴되며 다리 위에 있던 차량 6대가 추락했다. 32명의 사망자를 낸 이 사고는 빨리 결과물을 내놓으려는 정부의 조급함과 안전의식 없이 이윤만 남기려는 건설사 등 사회 전체의 부조리가 종합된 참사로 꼽힌다. 성수대교가 붕괴한 지 20년이 지났지만 변한 건 없다. 》  

“가슴에 묻은 딸입니다” “달리기도 잘하고 늘 적극적이었어요.” 딸에 대한 기억은 시간이 갈수록 흐릿해지기는커녕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늘 황인옥 씨 지갑 속엔 성수대교 붕괴사고로 세상을 떠난 딸 선정 양의 사진이 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그땐 헤어드라이어로 앞머리를 높게 띄운 짧은 커트머리가 유행이었다. 사진 속 딸은 빨간 체크무늬 옷을 입고 있었다. 무뚝뚝한 아버지였던 황인옥 씨(60)는 20년 전 성수대교 붕괴로 큰딸 선정 양(당시 16세·무학여고 1학년)을 잃고 나서야 딸이 타고 다니던 시내버스가 16번인 걸 알았다. 딸의 입학식, 졸업식 한번 못 챙긴 게 마음속 상처로 남은 아버지의 아픔은 아직 아물지 않았다.

○ 여전한 아픔에 가슴앓이 하는 가족

“대교가 무너졌다기에, 무슨 꿈같은 소린가 했어요.” 환경미화원인 황 씨는 참사 당일에도 근무를 했다. 새벽일을 마치고 뉴스를 보다 딸과 늘 함께 등교하던 조수연 양(당시 16세)의 이름이 사망자 명단에 뜨자 씻지도 못하고 학교로 달려갔다. 이어 병원으로 가 딸의 얼굴을 확인한 뒤 화장하기까지의 기억은 흐릿하다.

자책감이 들었다. 사고 발생 1년 전 근로자 아파트에 당첨돼 관악구에서 강남구로 이사를 온 게 계속 후회됐다. “내가 강남으로 이사만 안 왔으면 성수대교 건너 학교 갈 일은 없었을 것 아니오.” 견딜 수 없었던 황 씨 가족은 이듬해 인근 주택으로 이사했다. 사고 이후 매일 소주를 2, 3병씩 마시다 위암에 걸려 수술을 받기도 했다.

“큰딸이 김치찌개에서 참치만 건져 먹는다고 혼낸 게 한이에요. 하나 먹을 때 두 개 줄 걸 내가 왜 그랬나 싶어요. 원 없이 먹였어야 했는데….” 황 씨는 딸을 따라 가고도 싶었지만 남은 가족들이 걸려 극단적인 선택을 접었다. 그 대신 딸이 보고플 때마다 성동구에 있는 위령탑을 찾아 딸의 이름을 하염없이 보다 오곤 했다. 21일 기일에도 위령탑을 찾을 예정이다. 매년 10여 명이 모인다. “해마다 우리 부부만 갔는데, 올해는 20년인 만큼 둘째 딸이 낳은 손녀까지 다 데리고 갈 겁니다. 가서 이모 소개해 줘야죠.”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말도 꺼낼 수 없을 정도로 힘들다는 이들도 있었다. 사고 당시 가방에서 ‘사랑하는 아빠 보세요’라고 시작하는 편지가 발견돼 안타까움을 자아낸 이연수 양(당시 16세)의 어머니는 “그때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사고 전날 쓴 이 편지에는 아빠에게 혼난 뒤 “죄송하다”고 고백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양의 동생은 “그 일을 말하는 것 자체도 힘들다”고 했다. 한 가족은 문자메시지로 “주변 사람들은 내가 (성수대교 붕괴) 희생자 가족인 걸 모른다”며 “누가 아는 것도 싫고 조용히 살고 싶다”고 전해왔다. 성수대교 붕괴 5년 뒤인 1999년엔 위령비 앞에서 희생자 장세미 양(당시 18세)의 아버지가 농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 희생자 대신 꿈 실천 나선 가족

1994년 10월 21일 20년 전인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 현장. 무너진 성수대교 상판 위에 버스 등 차량이 크게 파손돼 널려 있는 가운데 대형 크레인이 승합차를 끌어올리고 있다. 이 승합차에 서울경찰청 소속 의경 11명이 타고 있었다. 동아일보DB

성수대교 붕괴로 숨진 여대생 이승영 씨(당시 21세) 가족들은 사고 이후 새로운 삶의 목표가 생겼다. 남동생 상엽 씨(38)는 “누나 유품에서 ‘버킷리스트’(죽기 전 하고 싶은 일의 목록)를 발견한 뒤 누나가 못한 걸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중 하나인 ‘장학금 제도 만들기’를 실현하기 위해 가족들은 희생자 보상금으로 받은 2억5000만 원 전액을 들여 ‘승영장학회’를 세웠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승영 씨는 선교를 나가거나 목사관을 짓고 싶어 했다. 이런 꿈도 어머니가 해외 선교에 나서며 이뤘고, 동생 상엽 씨는 결혼 후 자녀 2명을 입양해 ‘입양하기’란 누나의 꿈을 대신 이뤘다. 그 덕에 다른 유족처럼 성수대교를 피해 다니거나 사고 당시 이야기를 회피하지는 않지만 올해 4월 발생한 세월호 참사를 접하곤 “또 부조리 때문에 사고가 난 것 같아 화가 났다”고 했다. 상엽 씨는 “외국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로, 사고는 어디서든 나게 돼 있다”면서도 “다만 내가 일하는 분야에서만큼은 사고가 없도록 하자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를 보고 직업을 바꾼 유가족도 있다. 당시 16번 버스를 타고 출근하다 변을 당한 김중식 씨(당시 31세)의 동생 학윤 씨(47)는 정보기술(IT) 관련 업계에 있다가 세월호 참사 발생 1주일 뒤 한 건설회사의 아웃소싱 업체 현장관리직에 취업했다. 학윤 씨는 “매번 안전사고가 반복되는데 더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안전 지킴이’가 됐다”며 “정부가 종합적인 안전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학윤 씨에게 형 중식 씨는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한 가장이었다. “형에 대한 그리움을 떨치는 데만 10여 년이 걸렸다”는 학윤 씨는 “성수대교 사고 이후 하염없이 술만 마셨고, 차를 타고 가다 운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고 했다. 이런 아픔이 있기에 세월호 유족들에 대한 걱정도 컸다.

“그분들도 지금 가족이 꿈에 나타나고 금방이라도 문 열고 집에 돌아올 것만 같은 기분에 힘들 것 아닙니까. 세월이 다 해결해 주지는 않습니다. 유가족에게 꾸준한 심리치료가 꼭 지원돼야 합니다.”

강은지 kej09@donga.com·최혜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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