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수 서울대 철학과 교수
언제나 일에 쫓기면서 사는 데다 성격까지 급한 나는 둘째 딸이 내 옆에 누워 있겠다고 할 때에도 느긋하게 끌어안고 있는 그 시간을 참기 어려울 때가 있다. 딸 몰래 속으로 백까지 세기도 한다. 그런데 어제는 둘이 누워서 비틀스 노래를 큰 소리로 같이 불렀다. 그 순간에 느꼈던 사랑의 기억이 나중에 이 아이의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나 역시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가족이 인생의 어려운 난제 중 하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가족이 나를 지탱해 온 힘 중 하나였음을 깨닫는다. 인생에는 많은 굴곡이 있고 그런 굴곡을 이겨 나가게 하는 통찰을 가족 관계 속에서 얻었던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가족은 우리의 존재가 시작된 곳이고, 그래서 인생의 긴 흐름에서 등을 기댈 수 있는 언덕이다. 삶이 힘들 때 서로를 일으켜 주고 에너지를 충전해 받는 곳이기도 하다. 아이들이 마당에서 놀다가 뛰어 들어와 어머니 젖 한 모금 빨고 힘을 얻어 나가는 그런 원천 말이다. 요즘 주변에선 파괴적인 가족관계를 찾아보는 것이 어렵지 않다. 서로가 서로를 피하기도 한다. 이제 가족관계에서도 ‘소통’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아버지에겐 나름 이유가 있었다. 6·25전쟁 때 월남한 아버지는 어머니와 누이를 데리고 같이 피란을 가기로 했었는데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혼자 내려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훗날 아버지는 자신의 가족을 이루게 되었지만 ‘가족을 버렸다’는 죄책감으로 자신이 만든 가족의 화목함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었다. 비디오는 그런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 아들의 모습을 비추는 것으로 끝이 났다. 아들은 비로소 아버지와 소통을 시작할 계기를 얻게 되었다는 표정이었다.
그렇다면 가족 내 진정한 소통을 위한 전제는 무엇일까. 이 화두에 대한 영감을 지난주 한 사찰 방문 경험에서 얻었다. 외국에서 온 손님들이 수덕사를 방문한다기에 따라 나섰다. 선원에는 방장 스님과 선원장 스님 두 분만 계셨다. 외국 손님들은 방장 스님에게서 붓글씨 선물을 받고 싶어 했다. 선방에 즉석 서예 판이 열렸다. 방바닥에 한지를 깔고 방장 스님이 큰 붓을 들고 서서 쓰는 동안 옆에서 먹을 갈고 젖은 글씨를 닦아내고 다 된 것을 널어 말리는 일을 선원장 스님이 했다. 그에게서는 직책 높은(?) 스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시종일관 방장 스님의 시중을 드는 조수의 모습이었다.
우리는 방장 스님의 서예 작품을 받아 들고 선원장 스님 방으로 건너가 차담을 나눴다. 그때 만난 스님은 더이상 붓글씨 시중을 들던 조수가 아니라 우리에게 깨달음의 말씀을 전해주는 선원장 스님으로 돌아왔다. 나는 이렇게 여쭈었다. “그때 그 사람은 누구고 지금 이 사람은 누굽니까.” 그랬더니 스님은 “처처(處處)에 주인이 되어 그 역할에 충실하면 됩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문득 가족을 포함한 모든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감정적 긴장과 갈등의 많은 부분들도 ‘역할’이라는 것을 설정해놓고 거기에 매여 생각하는 ‘관념적 집착’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어머니는 어머니다워야 하며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역할’에 집착하면 권위가 생기고 기대가 생기고 거기서 갈등이 나오고…. 가족관계 역시 결국 ‘나’를 비운 상태에서라야 참다운 관계가 가능해지지 않을까.
조은수 서울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