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중앙청.
어느 때는 화려한 꽃밭, 어느 때는 물줄기 뿜어 오르는 분수, 또 어느 때는 도심의 스키장으로 변신하는 이 광장은 그야말로 트랜스포머티브(transformative)하다. 수도의 상징적 장소로는 너무나 천박하고 삭막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잔디와 들풀들이 가을바람에 흔들려 제법 전원적인 풍경이지만 그 밑이 콘크리트 바닥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안다.
맥락 없기는 옆에 늘어선 흰색 뾰족한 천막들도 마찬가지다. 영락없이 몽골의 게르(천막집)를 연상시켜, 외국인이 보면 한국의 역사적 뿌리가 몽골인가 착각하기 십상이다. 꽃을 심었다 뽑았다, 무대를 설치했다 허물었다 하면서 계절마다 들이는 돈은 또 얼마나 낭비인가.
식민주의를 청산해야 한다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에 의해 건물은 가루로 분쇄되었고, 나무는 뽑혀지거나 옮겨졌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궁궐을 가로막고 서 있던 웅장한 석조 건물이 일본 식민주의의 만행이었고, 박정희 시대에 복원된 광화문이 콘크리트 가짜 건물이라는 건 온 국민이 다 알고 있었다. 그것을 허물고 마치 우리가 식민 지배를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는 듯이, 마치 광화문은 한 번도 불타 본 적이 없다는 듯이 복원한다고 해서 우리는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는가?
형태나 재료의 면에서 불완전한 복원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지만, 설령 완전한 복원이라 해도 그것이 복제품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하나의 가짜를 다른 가짜로 대체하는 것이 무슨 그리 큰 가치가 있다는 말인가?
첫 번째의 가짜에는 최소한 ‘나는 가짜다’라는 정직성이라도 있었다. 보드리야르의 말마따나 한 바퀴 돌아 다시 돌아온 이중의 시뮐라크르(현실을 복제한 모사)일 뿐이다. 이념적 구호를 내세워 개인들의 사소하고 애잔한 기억과 건국 이후 수십 년간의 국가 역사를 지워버린 광화문 프로젝트는 아무리 생각해도 성급하고 무지막지한 폭력이며 오만이었다.
성곽을 복원한답시고 툭하면 옛집들을 헐어버리고, 야생동물의 통행로를 마련한답시고 걸핏하면 멀쩡한 도로 위에 인공 터널을 만드는 문화 권력들의 오만이 나는 너무 싫다. 그것을 막을 수 없는 개인의 무기력함이 안타깝고 가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