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 자의 두뇌를 20년 동안 작동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에 항거했던 그람시의 재판에서 나온 판결이다. 하지만 긴 옥중 생활에도 그의 두뇌는 멈추지 않았다. 그 결실인 ‘옥중수고’에 기동전(機動戰) 진지전(陣地戰) 개념이 나온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성공했는데 서구 유럽에선 왜 그러지 못했는지를 연구한 끝에 나온 이론이다. 제정 러시아처럼 낙후된 사회에선 군대 경찰을 공격하는 기동전으로 체제를 단숨에 엎을 수 있지만 자유주의와 시민사회가 발전한 서유럽에선 같은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분석이다. 그 대신 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장기적인 전략, 즉 ‘진지전’이 더 적합하다는 것이다.
▷보수 진영을 대표하는 소설가 이문열 씨가 최근 삼성 사장단회의의 강연에서 그람시의 ‘진지론’을 거론한 것이 화제다. 그는 “삼성과 같은 대기업은 국가를 구성하는 기본 구조이면서 동시에 진지의 역할도 해야 한다”며 다양한 지식인, 예술인 계층과 적극적 소통을 강조했다. 시장경제와 자유주의의 수혜자인 삼성이 산업 분야를 넘어 문화적 헤게모니를 위해 기여해야 한다는 조언이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