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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최영해]고달픈 청와대 ‘얼라들’

입력 | 2014-10-20 03:00:00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3년 5월 첫 미국 방문 때 청와대 당직실로 전화를 걸었다. 한국 시간으로는 오전 1시쯤이었다. 당시 청와대 당직자 중 한 사람은 침대에서 자고 있었고 다른 사람은 화장실에 있었다. 당직실에서 전화를 받지 않자 노 대통령은 국정상황실에까지 전화를 돌렸으나 역시 불통이었다. 나중에 경호실과 통화는 됐지만 화물연대의 파업 상황이 궁금했던 그는 단단히 화가 났다.

▷이 일로 청와대는 진상조사를 벌여 당직자 2명이 복무기강 해이로 징계를 받았다. 이후 당직자 가운데 한 사람은 잠을 못 자도록 당직실 침대 2개 중 1개를 아예 없애버렸다. 청와대 근무가 겉으로는 화려해 보일지 몰라도 비서관이나 행정관들의 노동 강도는 여느 부처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센 편이다. “별 보고 출근해서 달 보고 퇴근한다”는 대통령 비서들의 푸념이 빈말은 아니다. 청와대 사칭하는 사기꾼들이 ‘국장’ 타이틀을 흔히 내세우지만 청와대 직제에 국장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청와대에는 대선 캠프 출신의 ‘어공’(어쩌다 공무원)과 부처 파견 관료들인 ‘늘공’(직업공무원)이 섞여 근무해 묘한 조합을 이룬다. 정권 초기에는 각 부처의 공무원들이 서로 청와대에 근무하겠다며 나서지만 대통령 임기 말이 되면 끗발에서 밀리는 사람이 가는 경우가 흔하다. 청와대 근무자들이 달콤한 권력에 취해 흥청거리다가 벼랑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정권마다 반복됐다.

▷한때 친박(친박근혜) 의원이던 유승민 새누리당 의원이 국정감사장에서 청와대 근무자들을 지칭해 “청와대 얼라들”이라고 비꼬았다. ‘얼라’는 경상도 사투리로 ‘아주 어린 아기가 아닌 어린이 정도의 아가’를 뜻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미국 방문 중에 대통령 연설문 취소 소동을 둘러싼 청와대와 외교부의 미숙한 일처리를 질타한 것이지만 어감(語感)이 참 고약하다. 도매금으로 ‘얼라’ 취급을 당한 청와대 직원들의 기분이 어땠을까. 유 의원의 속은 후련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표현이 지나치면 말의 효과나 진정성은 반감된다는 사실을 깜빡 했던 것 같다.

최영해 논설위원 yhchoi6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