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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가 돼버린 환풍구… 덮개 곳곳 휘어져

입력 | 2014-10-20 03:00:00

[판교 공연장 참사/거리에 도사린 추락위험]
서울시내 환풍시설 점검해보니




안전 무방비 환풍구… 일부에만 안전펜스 19일 동아일보는 이창우 숭실사이버대 소방방재학과 교수(위 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와 환풍구 긴급 점검에 나섰다. 이날 서울 분당선 선정릉역의 한 환풍구 덮개는 트럭이 밟고 지나간 듯 정상 덮개보다 4cm가량 내려앉아 있었다(위 사진). 유리벽을 설치해 행인들의 진입을 막은 3번 출구 앞 환풍구와 대조적이었다(아래쪽 사진). 이 교수는 “간단하게 유리벽만 설치해도 환풍구 통행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판교 환풍구 추락사고’로 16명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지자 도심 곳곳에 위치한 환풍구에 대한 안전점검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하시설물들이 늘면서 지하의 오염된 공기를 바깥으로 내보내는 환풍구는 지하철역과 지하주차장 인근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문제는 이들 중 상당수가 인도(人道) 주변에 위치해 통행 혼잡이나 대형 행사 개최 시 ‘통행로’ 또는 ‘관람 장소’로 용도가 변질돼 안전사고의 위험성이 크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안전규정 미비와 안전 불감증이 결합되면서 또 다른 환풍구 관련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 내구성 취약…방치된 도심 속 환풍구들

본보 취재팀은 19일 이창우 숭실사이버대 소방방재학과 교수와 함께 서울 강남구 선정릉역(분당선) 인근 환풍구 안전점검을 실시했다. 인도 폭의 3분의 2에 달하는 환풍구는 버스 정류장에 인접한 데다 주변에 학교가 많아 학생과 직장인 등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 있다.

가로 2.5m, 세로 15m, 깊이 20m의 한 환풍구는 16개의 철제 덮개로 덮여 있는데 높이가 고르지 않고, 사이가 벌어져 있었다. 환풍구 오른쪽으로부터 6, 7번째 덮개와 15, 16번째 덮개 사이는 4cm가량 높이가 달랐다. 기자가 직접 환풍구 위에 올라가 발을 굴러보니 틈새는 더 크게 벌어졌고, 덮개는 손으로도 쉽게 들어올려졌다. 또 일부 덮개는 무언가에 눌린 듯 아래로 휘어져 있었다. 이 교수는 “행인은 물론이고 차량들이 턱이 낮은 덮개를 밟고 지나가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휘어진 것 같다. 하중을 골고루 분산시키지 못한다는 문제점이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역 일대 일부 환풍구에는 유리 보호벽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환풍구는 시민들의 접근을 차단하는 ‘안전펜스’가 없었고 출입을 차단하는 경고 문구조차 붙어 있지 않았다.

2호선 교대역과 5호선 애오개역 인근 환풍구도 상황이 비슷했다. 택시를 잡기 위해 시민들이 위태롭게 환풍구 위에 서 있는가 하면 발을 굴렀을 때 흔들림이 느껴지는 환풍구도 많았다.

○ 안전점검 규정 전무, 환풍구 사고 위험 키워

환풍구의 구체적 설비기준이나 안전점검 규정이 없다는 점은 안전관리 부실을 키운 요인으로 꼽힌다. 국토교통부의 ‘건축물의 설치기준 등에 관한 규칙’을 보면 지하역사 등에 환기설비를 의무적으로 설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환기설비 덮개의 재질이나 강도, 안전점검 실시 등에 관한 규정은 없다.

지하철에 적용되는 ‘도시철도건설규칙’도 외부에 노출된 배기구의 내구성이나 안전설비에 대해선 별다른 규정이 없다. 서울메트로 측은 “안전관리 및 단속 규정이 없는 것은 맞지만 m²당 350kg의 하중을 견딜 수 있게 설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설비기준은 통행량과 설치 장소에 상관없이 일괄 적용되고 있어 보행자가 몰리는 지역 환풍구의 안전성을 보장할 수 없다.

국토부는 18일 환풍구 추락사고 재발을 막기 위해 관계기관에 환기 구조물 등의 안전점검 실시를 지시했다. 덮개가 열려 있거나 느슨해진 곳은 없는지 살피고, 안전펜스를 설치하도록 건물주에게 권고할 계획이다. 또 점검 결과를 바탕으로 법적 기준이 필요한지도 검토할 방침이다.

○ 시민들의 ‘안전 불감증’ 종식돼야

이달 4일 서울지하철 5호선 여의나루역 인근 환풍구에서는 ‘판교 환풍구 추락사고’ 직전과 유사한 상황이 벌어졌다. 서울세계불꽃축제를 보기 위해 모인 시민들이 출구 인근에 위치한 환풍구 위로 우르르 올라갔기 때문이다. 행사를 기획한 광고대행사 관계자는 “시민 한 명이 (환풍구 위로) 올라가자 머뭇거리던 사람들도 뒤따라 올라갔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날 행사는 안전요원들이 환풍구 위로 올라간 시민들을 끌어내려 사고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지난해 11월 3일에는 고교 1학년생(17)이 부산 해운대구 모 백화점 앞 공원에 있는 환기구에 올라갔다가 15m 아래 백화점 지하 6층으로 추락해 숨진 사고가 있었다.

환풍구는 주위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용도로 쓰일 수 있는 문제점이 있다. 조원철 연세대 사회환경시스템공학부 교수는 “환풍구 인근에서 불이 났다거나, 대규모 행사가 열릴 때는 시민들이 더 높은 곳에서 상황을 보기 위해 환풍구를 발판으로 사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 경우 안전요원만으로는 돌출 행동을 막기 어렵다. 전문가들은 “환풍구 관리의 제도적 보완뿐만 아니라 시민의 안전 불감증 문제 해결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정윤철 trigger@donga.com·강홍구·홍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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