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말 장성택 숙청을 앞두고 양강도 삼지연을 방문한 김정은(앞)과 그의 뒤를 따르는 조연준(검은 털모자), 황병서(왼쪽에서 두 번째) 등 조직지도부 간부들. 동아일보 DB
주성하 기자
경호 속에 앞서 가는 황병서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최룡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불과 5개월 전만 해도 황병서가 갖고 있는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군 총정치국장 직함은 최룡해의 것이었다. 왕별이 번쩍이는 차수 군복까지…. 하지만 지금은 다 빼앗기고 황병서가 북한의 실세임을 전 세계에 과시하는 마당에 끌려와 들러리 서는 굴욕적 신세가 됐다.
황병서 김양건은 지난해 11월 말 김정은과 함께 백두산 삼지연특각에 은밀히 모여 장성택 제거 작전을 모의했던 ‘어제의 동지들’이었다. 그때만 해도 권세가 하늘을 찌르는 장성택만 제거하면 최룡해의 세상이 열릴 줄로 믿었다. 하지만 최룡해 천하는 불과 반년으로 끝났다. 최룡해는 한직으로 밀렸고, 북한은 조직지도부가 거머쥐었다. 조직이 없는 최룡해의 한계였다. 최룡해의 파벌은 1990년대 말 김정일에 의해 숙청됐다.
하지만 이 구도는 김정일 사망 반년 만에 장성택의 선공으로 무너졌다. 2012년 7월 군부파 수장인 이영호가 숙청됐고 노동당 행정부가 모든 권력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1년 반 뒤 장성택이 숙청되고선 지금은 ‘組(조)피아 세상’ ‘만사組통’ 시대가 시작됐다.
이 그림을 그린 책사는 조직지도부 1부부장인 조연준이다. 노회한 조연준은 군부를 꺾을 땐 장성택을, 행정부를 제거할 땐 최룡해를 밀었다. 나중엔 뿌리 없는 최룡해를 손쉽게 뽑아내고 최후의 승자가 됐다. 구호탄랑(驅虎呑狼) 이이제이(以夷制夷) 이호경식(二虎競食) 같은 삼국지의 계략들에 도통한 듯하다.
조연준에게 여한이 있다면 올해 77세로 늙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오른팔인 65세 황병서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우고 자신은 그림자 실세로 남은 까닭일 것이다. 최근 황병서에 대한 김정은의 신임이 날로 두터워지곤 있다지만 여전히 ‘어미새’ 조연준의 파워는 넘지 못하고 있다. 혹여 황병서가 배신한다 해도 조직지도부라는 뿌리에서 떨어져나간 줄기를 자르는 것쯤은 조연준에겐 일도 아닐 터이다.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오늘날 조연준은 각종 주요 비공개 회의를 주재하며 국가 정책까지 좌지우지하고 있다. 김정은은 그가 올리는 서류엔 무조건 서명한다고 한다. 후계구도에서 멀어져 있던 자신을 왕으로 밀어준 그보다 더 믿을 만한 사람을 찾긴 어려웠을 것이다.
최룡해는 장성택 숙청에 가담했던 자신의 업보를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다. 그는 판이 이렇게 돌아갈 줄 몰랐을 것이다. 조연준보다 머리가 나빴던 것이 죄라면 죄다.
삼지연에서 함께 음모를 꾸몄던 보위부장 김원홍의 후회는 최룡해보다 몇 배로 더 클지 모른다. 군 보위사령관이던 김원홍은 장성택을 등에 업고 2012년 4월 보위부의 실세였던 우동측 1부부장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타고 앉았다. 그때만 해도 조직지도부는 김원홍의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김원홍은 불과 3년 만에 목 떨어지는 날을 피 마르게 기다리는 신세가 됐다. 조직지도부가 군부에서 최룡해를 몰아내고 황병서를 올려 세웠듯이 보위부 수장도 조직지도부 아무개로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가 됐다. 벌써 조직지도부는 김원홍의 아들 뒷조사를 하면서 압박해오고 있다 한다. 지금 김원홍이 할 수 있는 일은 기세등등한 조직지도부 환관들의 눈치를 살피는 푸들이 돼 자비를 구하는 것뿐이다. 물론 김원홍이 손에 쥐고 있는 황병서를 비롯한 조직지도부 실세들의 개인비리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김정은의 문고리를 그들이 틀어쥐고 있는 한 잘못 건드렸다간 김원홍 3대가 멸족할 수 있다.
조직지도부는 김일성대 출신이 다수인 북한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다. 이들은 앞으로 라이벌 세력의 등장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이대로라면 김정은은 조직지도부에 조종당하는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김정은은 당분간 환관들의 득세를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허나 그가 훗날을 도모하려는 생각이 있다면 김원홍의 목은 지켜줘야 할 것이다. 그게 목전의 승부처가 됐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