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사람을 애지중지하면 회사가 살아납니다
시슬리 코리아 대표 홍병의
시슬리에 ‘명인’이 있다는데 무슨 얘기인가요.
“1998년 시슬리 코리아를 세운 후 처음으로 지난해 판매사원 한 사람이 정년을 맞게 됐어요. 판매사원의 정년은 50세로 좀 이른 편이지요. 사규대로라면 퇴직해야 하지만, 회사 창립 때부터 헌신했고 능력도 있는 사람을 그만두게 해야 하는 것이 안타까웠죠. 몇 달을 두고 고민하면서 몇 차례 만나 상담도 했습니다.
정년퇴직한 직원을 재고용하셨군요.
“그렇습니다. 명인에게는 영업, 마케팅 임원은 물론 CEO 눈치도 볼 필요 없이 스스로 스케줄을 짜서 일하도록 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은 각 매장을 방문해 후배 판매사원들을 격려하고 가르치며 그들의 어려운 이야기들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오래 근무하는 직원이 많다고 들었는데요.
“좋은 직원은 회사를 운영하는데 가장 큰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좋은 직원이 오래 일하게 하려면 인간적인 대우도 중요하지만 실질적인 혜택을 주는 것 또한 필요해요. 초기에는 직원들을 말로만 위하는 게 아닌가, 의심의 눈길을 받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제가 직원들과 같은 편에 있다는 신뢰를 얻게 된 것 같습니다.”
“제 학부 전공이 무역학이고, 미국 대학원에서 마케팅을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대학원 마케팅 교재가 거의 비슷합니다. 대부분 소비자 분석에 대한 내용들이죠. 처음에는 학교에서 배운 마케팅 이론을 적용해보기도 했지만, 다 지난 얘기예요. 요즘 가장 집중하는 것은 ‘팸퍼링(pampering)’, 즉 고객을 애지중지하는 일입니다.”
어떻게 적용하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예를 들어 고객이 40만 원 정도를 쓰려고 매장에 갔는데 판매사원이 강권해서 80만 원 이상 화장품을 팔았다면 언뜻 잘한 것 같지만, 실제 그렇지 않습니다. 고객이 나중에 집에 돌아가서 후회하는 경우가 적지 않거든요. 진실하지 않은 마음은 고객도 금방 알아차려요. 만일 고객이 관심을 갖는 제품에 대해 ‘이 제품은 우선 샘플을 먼저 써보고 나중에 구매하라’고 권한다면 어떨까요? 진심으로 위하는 마음은 서로 통한다고 생각합니다.”
스타일이 멋지기로 소문난 홍 대표. 그가 입는 의상은 명품 브랜드가 아니다. 옷을 수선하러 갔다가 우연히 알게 된 작은 맞춤집이나 국내 기성복 브랜드에서 자유롭게 사 입는다. 유행을 좇기보다는 자기 스타일을 알고, 자기 방식대로 해석·연출해야 자연스럽고 세련된 멋쟁이가 될 수 있다는 게 그의 패션 철학.
▼ “겸손하되 비굴하지 말라” 아버지의 조언 가슴에 새겨 ▼
“지난해 돌아가신 아버지는 제가 미국에 유학 가 있던 6년간 무려 200여 통의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여백 없이 빽빽하게 서너 장씩 써내려간 편지에는 사회생활이나 진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얘기가 자세하게 적혀 있었죠. 아들에 대한 걱정과 사랑, 희망 같은 것들을 아버지가 정성스레 편지에 담으셨던 겁니다.
아버지의 말씀이 제게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그야말로 저를 애지중지하시는 진한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마음은 반드시 전해진다는 것, 아버지에게 배운 것이죠. 아버지의 편지는 제가 언제든 꺼내 볼 수 있게 사무실에도 두고, 휴대전화에도 저장해 두었습니다.”
홍 대표는 아버지와의 추억을 한참 동안 이야기했다. 그의 아버지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가족을 위해 헌신하며 성실하게 살았던 가장이었다. 그가 고등학교 2학년 때 퇴직한 아버지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들을 기다렸다가 조용한 서오릉에 데려가곤 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아들과 나란히 앉아 ‘내가 세상을 살아보니 이렇더라’ 두런두런 세상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버지에게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나봅니다.
“아버지가 자주 하시는 말씀 중 하나는 ‘겸손하되 비굴하지 말라’였죠. 아버지는 ‘사람은 모두 일대일의 관계’라고 하시면서 ‘인간관계에 있어서 겸손하고 예의바른 게 으뜸이지만 마음가짐은 항상 당당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어요. 제가 사업을 이끌어오면서 가장 많이 떠올린 조언입니다. 특히 별 자본도 없이 시슬리 코리아를 세웠을 당시 마음에 되새겼던 말이죠.
또 하나 중요한 가르침이 ‘내 식구부터 잘 챙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화장품 판매 회사가 고객과 일대일로 만나는 판매사원을 잘 챙기지 못하면 잘될 수가 없죠. 다행히 초창기부터 저와 함께했던 직원들은 훌륭하게 일을 해줬고, 저도 아버지 말씀대로 내 식구인 직원들을 챙기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판매사원과 판매현장을 특히 중시하는 것 같은데요.
“우리 화장품과 고객이 만나는 곳이 바로 판매현장입니다. 그래서 현장에 있는 판매사원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현장은 경험해보지 않으면 잘 몰라요. 임원들에게 가장 먼저 판매사원들의 말을 경청하라고 강조합니다. 판매사원을 우대하고 승진시켜 성장할 수 있게 하고 있죠.”
현장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 특별히 하는 일이 있나요.
“7∼8년간 판매사원들에게 한 달에 한 번씩 리포트를 받아 그 의견들을 적극적으로 반영했습니다. 판매사원이 현장에서 직접 경험하고 느낀 내용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서죠. 지금도 신입사원까지 포함해 전 직원이 제게 직접 e메일을 보내도록 하고 있습니다. 판매사원들의 경우 고객과 나눈 얘기, 고객에게서 받은 정보 등을 바로 제게 보냅니다. 현장 사안에 대해 제가 먼저 알 때도 있기 때문에 때로는 실무 담당자들이 곤란해 하기도 하죠(웃음).”
홍병의 대표… 1958년생. 성균관대학교 무역학과 졸업 후 미국 오리건 주립대학에서 MBA 취득. 1987년 해태상사에 입사해 명품 화장품 수입 업무를 하며 프랑스 화장품 브랜드 시슬리와 첫 인연을 맺었다. 1998년 시슬리 코리아를 설립했다. 그간 시슬리 코리아 CEO로 매출 규모를 10배 이상 키워낸 그는 “내 직급은 18년째 변화가 없지만 회사는 계속 진화하고 있다”며 지속적인 성장을 내다봤다.
고객 관리는 어떻게 하나요.
“고객과 정기적으로 식사자리를 갖고, 전시회 음악회 등 소그룹으로 문화 초청 행사를 합니다. 물론 감사의 뜻을 전하는 자리지만 고객의 의견을 직접 듣는 자리도 되죠. 이때 솔직하고 날카로운 평을 많이 들으려고 노력합니다.”
직원들과는 매월 ‘애니메이션 미팅’을 한다고 들었는데요.
“임원들과 마케팅 영업 담당 전 직원이 참석해 한 가지 주제로 하루 종일 진행하는 회의죠. ‘생기’를 뜻하는 애니메이션(animation)이라 이름 붙인 것은 ‘제품에 생기를 불어넣는 회의’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이달 회의의 주제는 ‘재구매’였죠. 신제품을 출시하면 제품을 알리기 위해 총력을 다합니다. 시슬리 화장품은 매년 10만 명 정도의 고객이 산다고 보는데, 신제품은 가격과 상관없이 거의 일정량이 팔립니다. 이 제품을 다 썼을 때 재구매가 이루어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죠. 두 번을 쓰게 되면 제품에 대한 친숙도가 높아지고 시슬리의 고정 고객이 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재구매를 위한 여러 의견이 나왔고 공감대도 형성했죠.”
시슬리 화장품을 사용하는 여성의 이미지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꾸미지 않은 것 같은 자연스러움, 그것이 시슬리가 추구하는 이미지입니다. 시슬리는 산뜻하고 흡수가 빠른 편이죠. 그것이 바로 시슬리의 노하우입니다.”
글/계수미 전문기자 soomee@donga.com
김경화(커리어 칼럼니스트, 비즈니스 라이프 코치)
사진/박동균(스타일 포토그래퍼)
동아일보 골든걸 goldengirl@donga.com
▼ [골든걸’s Comment] 20년 넘게 곁에서 지켜본 홍병의 대표는… ▼
“직원의 장점을 보고 기다려주는 사람” - 안경옥 시슬리 코리아 마케팅 본부장
해태상사 과장 시절부터 현재까지 20년 넘게 홍병의 대표와 함께 일했다. 그의 최고 강점은 ‘사람의 장점을 보는 것, 그리고 기다려주는 것‘이다.
홍 대표는 상대의 약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잘하는 부분에 대해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잘 못하는 부분을 야단치거나 비난하면 개선되기보다 오히려 주눅 들게 만들고 관계만 악화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난 “직원들에 대한 상벌이 분명해야 한다”며 ‘야단치지 않는’ 홍 대표를 때론 답답해하기도 했다. 그런데 장점만 바라보고 칭찬하고 격려하며 기다려 주자 직원들은 자신감을 갖고 최선을 다해, 어느새 자기 분야의 전문가가 돼 있었다.
홍 대표는 400여 명에 이르는 전 직원의 이름을 모두 기억한다. 개인적으로 소소한 부분까지 파악해 이야기를 건네는 그를 보면서 기억력이 뛰어나다고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수시로 입사원서를 살펴보면서 신상을 익히는 게 아닌가. 이렇게 세심하고 따뜻하게 노력하는 대표이기에 ‘모든 직원의 연인’이라 불리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