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큰한 시월
―전영관(1961∼)
작년에 나, 뺨 맞았잖아
장성댐이 깊기는 깊더구만 가을이 통째로 빠졌는데 흔적 없고
조각구름만 떠다니더군 백양사 뒷산 정도야 그 남색 스란치마에 감기면
깜박 넘어가지 않겠어 뛰어들까 싶기도 한데
집사람 얼굴이 덜컥 뒷덜미를 채더군
수제비도 구름같이 떠오르는 어죽(魚粥) 한 사발 했지
반주로 농탁(農濁) 몇 대접 걸쳤다가 휘청
단풍에 취한 낭만파처럼 평상에 누웠던 거 아닌가
목침 베고 한 잠 늘어진 뒤 화장실에 가보니 아 글쎄
벌건 뺨에 손자국 선명한 거라 애기과부 손바닥 같은 단풍잎 대고 누워
잠시 딴살림 차렸던 거라 뭣에 쫓기기는 한 듯
뒷골 얼얼하니 내려오는 내내 흙길도 출렁거리더군
오늘 나, 거기로 뺨 맞으러 간다
혼자 쓸 한나절쯤 배낭에 챙겨 넣고 지팡이 들고
는실는실 웃는 고것들 후리러 간다 농탁(農濁)에 엎어진 핑계로
작년처럼 낮잠 한 숨 퍼지르고 올 참이야 한쪽 뺨 벌겋게 얻어터져야
후끈한 뒷맛으로 올 겨울 얼음고개 넘지 않겠나
화자는 가까스로 정신 차리고 발을 돌린다. 한산한 주막에 들어 폭 고은 어죽에 곁들여서 걸쭉한 농주를 몇 대접 마시고, 단풍나무 아래 평상에 누웠다가 ‘애기과부 손바닥 같은 단풍잎’이 뺨에 자국을 내도록 한잠 늘어진다. 그 자국이 아리따운 여인한테 맞은 매운 따귀 자국 같단다. 단풍잎 한 장에도 관능을 느끼는 시인! ‘뒷골 얼얼하니’ 흙길을 내려온 뒤, 쫓기듯 사느라 낭만이 멋쩍은 생활인인 화자에게 그 풍경 속 시간은 내내 낭만으로 남아 있다. 이 가을에 그는 숨겨둔 애인을 찾아가듯 다시 그곳에 갈 참이다. 그래야 ‘후끈한 뒷맛으로 올 겨울 얼음고개 넘지 않겠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