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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허진석]그 많던 문고본은 왜?

입력 | 2014-10-24 03:00:00


허진석 채널A 차장

잘 뻗어 내려간 다리와 잘록한 허리. 그 실루엣이 다 비치는 하늘하늘한 한복을 입은 20대 아가씨가 당구를 치고 라면을 먹는다. 다리를 벌리고 앉는 흐트러진 자세도 마다하지 않는다.

한국화 ‘내숭 시리즈’로 요새 인기를 모으는 김현정 작가의 그림풍이다. 그는 26세이고, 그림은 자화상이다.

정욕(情慾)의 뇌관을 살짝 건드리지만 그것이 폭발하지 않도록 재치라는 안전장치를 넣었다. 그래서 그림은, 외설과는 한참 거리를 두면서도 야하다. 영리한 거다.

실제로 대화를 나눠 봐도 영리함이 뚝뚝 묻어난다. 인터넷에 사진이나 그림을 올리는 사람들은 자신의 작품이 함부로 쓰일까봐 다운로드를 막아놓지만 그의 홈페이지엔 그런 방지장치가 없다. 많은 사람이 그의 그림을 바탕화면으로 쓰는 연유다.

매력 있는 콘텐츠의 디지털 복제품이 퍼지자 진품에 대한 관심과 가치는 오히려 높아졌다. LG생활건강이나 여타 기업들로부터 협업(컬래버레이션) 제안도 적잖게 받게 됐다.

최근 ‘살림출판사’가 ‘살림지식총서’라는 문고본 책의 500호를 발간한 것이 주목을 받았다. ‘그 많던 문고본은 어디로 갔을까’라는 질문이 나올 만큼 문고본이 거의 사라진 상황이기 때문이다.

작고 가벼우면서 가격까지 ‘착한’ 문고본. 1970, 80년대엔 문고본이 적지 않아 그에 얽힌 추억을 누구나 하나쯤 갖고 있다. 교보문고에서 만난 안산 고잔고 조종현 교사는 “그 느낌 아실는지 모르겠네요. 그 특유의 거친 질감, 그리고 독특한 냄새…. 여하튼 그걸로 유명 문학작품을 많이 읽었죠”라며 신나게 추억을 들려줬다.

문고본에 대한 부활 시도가 없진 않았다. 2008년엔 17개 출판사가 모여 100권의 책을 한꺼번에 문고본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절실했던 그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출판 시장이 줄어들면서 이미 히트를 친 작품을 다시 값싼 문고본 형태로 내놓더라도 사 줄 사람이 많지 않고, 책에 대한 한국 사람의 기호가 ‘읽기’ 못지않게 ‘소장’에도 방점이 찍혀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지금은 인문서의 경우 살림출판사와 ‘책세상’ 정도가 문고본을 내고 있다.

커피 한잔 값도 안 되는 싼 문고본마저 사라져 가는 건 결국 콘텐츠 시장에 불고 있는 ‘공짜’ 바람과 무관치 않다. 추가 비용을 거의 들이지 않고 콘텐츠를 무한 복제하는 것이 가능해진 시대에 사람들은 콘텐츠에 작은 비용이라도 지불하는 것을 꺼리는 것이다.

김현정 작가는 ‘한계 비용 제로’나 ‘공짜 경제학’ 시대라고 불리는 이 파도를 잘 타고 있는 거다.

위축된 출판계에도 그의 방식을 적용해 책을 좀 더 흥하도록 할 순 없을까. 미술품은 진품과 디지털 복제품의 구분이 쉽지만 안타깝게도 텍스트는 그렇지 않아 쉽게 해답이 떠오르진 않는다. 책을 소장용 예술품처럼 만들면 될까. 작가의 손길이 담긴 뭔가를 책에 넣으면 될까. 어렵겠지만 길은, 분명 그런 공짜 경제학의 파도를 타는 데 있는 것 같다.

허진석 채널A 차장 james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