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憧憬 이종찬 회고록]〈10〉 중정 개혁안의 끝
1975년 12월 신임 최규하 국무총리가 업무 인계차 총리실을 방문한 전임 JP에게 상석을 권하는 모습. 이로부터 4년가량이 지난 10·26 직후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은 JP와 2시간가량 회동한 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통령 보궐선거 출마를 선언한다. 동아일보DB
전 부장은 1안보다 2안을 선택했다. 그리고 한참을 생각하다 이렇게 말했다.
김 실장은 내 얼굴만 쳐다봤다.
“100명은 퇴직, 100명은 대기 또는 재교육, 그리고 나머지 100명은 당분간 초과운영, 이렇게 세 그룹으로 나눠 1년간 운영해보겠습니다.”
전 부장은 내 말에 약간 안도하면서 “그러면 한 50명만 정리하지, 어때?”라고 했다.
그 순간 허삼수 대령이 말을 가로막았다.
전 부장은 허 대령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한마디 뱉었다.
“남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면 내 눈에는 피가 흐르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게. 그런 마음을 갖고 100명을 정리하게.”
부장이 재가한 안을 갖고 서정화 국내담당 차장에게 설명하러 갔다. 그는 표정부터 구겨졌다.
“앞으로 중앙정보부가 사회혼란 예방과 안보를 책임져야 할 터인데 이렇게 편제를 줄여놓으면 어떻게 일할 수 있단 말이오?”
“차장님! 지금 국민들은 10·26이란 사건을 경험하면서 중앙정보부가 변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정보부의 개혁은 국민적 합의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국가에 대한 임무는 임무 그대로 아니오? 내가 부장님과 다시 의논하겠습니다.”
나는 할 수 없이 물러나왔다.
새 개편안에 따라 인사를 짠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작업이었다. 허 대령은 수시로 숙정명단을 내놓았다. 족집게 무당처럼 한사람, 한사람 명단을 내놓았는데 배후에서 누가 제보해 주는 사람이 분명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고자질은 대개 사감이 많이 작용하는 법이다. 이러다가 잡초를 제거하기는커녕 양질의 화초만 제거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인사과장을 맡게 된 윤석순은 합리적인 간부로, 오랫동안 내가 신뢰했던 동지였다. 그는 허 대령과 부산고 동기였다. 나의 부담이 한결 가벼워졌다.
5월 13일 인사안 준비로 고심하고 있을 때, 사회분위기는 점점 험악하게 돌아갔다. 학생데모는 날이 갈수록 격화했다. 정치인들은 모두가 ‘서울의 봄’을 이용하고자 설득인지, 선동인지 분간할 수 없는 연설을 하고 다녔다.
전 부장은 당분간 사회분위기가 진정될 때까지 개편작업을 중단하라는 지시를 내려보냈다. 서 차장은 회의 때마다 지금은 개편이 아니라 전 부원이 나서서 사회혼란세력과 맞서 싸울 때라고 주장했다.
5월 15일 학생들의 데모가 피크에 달했다. 구호는 노골적으로 “신현확과 전두환 물러가라!”로 바뀌어 있었다.
5월 16일 밤 중동을 방문 중이던 최규하 대통령이 급거 귀국했고, 5월 17일 오전 11시 국방부에서 전군주요지휘관회의가 열렸다. 심야에 최규하 대통령의 지시로 국무회의가 소집돼 계엄확대실시가 즉각 의결됐다.
나는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국내부서를 너무 줄여 놓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손을 약간 댔다. 특히 수사기능은 대공과 보안으로 나누되 대공수사는 완전 편제로 두기로 하고, 국내보안수사는 잠정 편제로 두는 절충안을 만들어 다시 부장에게 보고했다.
5월 29일 드디어 개편안을 들고 청와대로 갔다. 나는 전 부장을 따라 대통령실로 들어갔다. 소형 차트를 펴고 브리핑을 시작하려는데 최 대통령이 불쑥 한마디 먼저 했다.
“요새 젊은 놈들은 빨갱이가 무엇인지 모른단 말이야! 교육을 단단히 해야겠어.”
개편안에 대해서는 별반 이의를 달지 않았다.
나는 몇 차례에 걸쳐 인사위원회를 열어 부득이하게 정리할 수밖에 없는 대상자 약 100명을 추려서 보안사령관실로 갔다.
전 부장은 결재서류와 그 뒤에 첨부된 인사카드를 보더니 결재서류는 옆으로 제쳐두고 인사카드만 몇 장 골라냈다. 그중에 L 씨 카드가 들어있었다.
“이 사람 왜 안 된다는 거야?”
“네, 몇 차례나 검토하였는데 이 사람은 외사업무를 하면서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지 않고, 미군 PX만 드나들면서 뒷거래를 일삼았습니다.”
“이사람 누가 추천해서 부원이 된 줄 알아?”
그는 전 부장과 고교 동기로서, 기록카드에는 또렷이 ‘추천인 전두환’이라고 되어 있었다.
“네. 알고 있습니다. 부장님께서 추천한 사람이어서 더 신경을 썼습니다. 그런데 인사위원들이 이런 사람을 두면서 다른 사람을 자르면 공정하지 못하다는 평을 듣게 될 것이라고 하여 고민 끝에 포함시켰습니다.”
전 부장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더이상 카드를 보지 않고, 결재서류에 강하게 서명을 했다. 그리고 한마디 했다.
“뻔히 내가 추천한 줄 알면서도 정리대상에 포함시킨 것을 보니 이 심사는 일단 공정하다고 나는 인정하네. 그래서 믿고 결재하는 것이야! 다만 퇴직하는 사람들 생활문제는 신경을 써주기 바라네.”
▼ “軍이 반대” 체육관 선거 바라만 본 JP ▼
JP “2인자는 1cm도 떨어지면 안된다”
1980년 5월 17일 신현확 국무총리가 주재한 심야 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 확대조치를 의결하기 전날인 16일 오전, 보안사령부는 전군 보안부대장과 수사과장 회의를 소집했다. 김종필, 이후락, 박종규, 김진만, 김치열, 오원철, 김종락…, 이른바 ‘권력형 부정축재자’를 사전 검거하기 위한 회의였다.
김종필(JP)은 47일간 보안사의 악명 높은 서빙고 분실에서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해 8월 전두환으로부터 보안사령관 자리를 물려받은 노태우 중장이 어느 날 JP를 초청해 식사를 대접했다. ‘악어의 눈물’이긴 하지만, 어쨌든 군 선배를 욕보인데 대한 위로의 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나온 JP의 어록. “2인자는 (권력자에게서) 1cm도 떨어지면 안 된다.”
JP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멀어진 건 이미 오래된 일이었다. 박정희가 1975년 5월 21일 김영삼(YS)과 회동한 이유 중의 하나도 JP의 대안을 찾기 위한 ‘인물 테스트’였다고 이종찬은 기억하고 있다. 이종찬의 증언. “박정희 대통령은 같은 경상도 출신인 YS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YS도 공화당 사전조직 때 (입당) 문지방 앞까지 갔습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YS를 만난 뒤 ‘대통령감’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당시 국무총리는 JP였다. 박정희로선 JP에게 마지막 기회를 준 셈이었지만, JP 역시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그런 정황을 짐작케 해주는 일화가 있다.
이종찬이 김대중 정부의 국정원장을 마치고 하와이에 머물고 있을 때, 역시 하와이에 와있던 남덕우 전 국무총리를 자주 모셨다. 어느 날 JP가 하와이를 방문했다.
“JP가 왔는데 함께 식사라도 하시죠.” 이종찬은 남덕우에게 그렇게 권했다. 당연히 같이 하자고 할 줄 알았다. JP 총리 시절 남덕우는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이었다. 그러나 남덕우는 선뜻 응하지 않았다. 대신 이런 말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JP가 총리할 때 ‘영상(領相)이 영상다워야지…’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남덕우는 끝내 JP를 만나지 않았다.
“영상이 영상다워야지…”라는 말은 그냥 말로 끝나지 않았다. 박정희는 1975년 12월 개각을 단행해 김종필 총리를 물러나게 하고 최규하를 그 자리에 앉힌다.
10·26 직후 공화당 총재로 선출된 JP에게 일부 의원들은 대통령 보궐선거 출마를 강력히 권유했다.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뽑는 ‘체육관 선거’지만 일단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JP는 결국 포기하고 만다. 명분에도 맞지 않았지만, 군의 반대도 영향을 미쳤다.
JP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통령 후보 출마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소집된 공화당 의원 총회 직전, 신현확 부총리가 이만섭 의원을 찾았다. “이 의원, 절대로 김종필 씨가 출마하지 않도록 얘기 좀 하시오. 지금 군에서 심하게 반대하고 있소.”
JP의 ‘1cm’ 어록 속엔 아마 그런 회한들이 모두 들어 있었을 것이다.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