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도 중시하는 한국, 기록만을 신봉하는 일본 그러나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 A급 전범을 애국자로 모시는 야스쿠니는 기록을 기억으로 덮고 부산의 강제동원역사관은 기억을 기록으로 바꾸려 한다 끝없을 기억과 기록의 충돌… 우리는 제대로 대비하고 있는지
심규선 대기자
최근 양국의 평소 태도와는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두 곳을 잇달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일본도 기록보다 기억을 앞세우고, 한국도 기억보다 기록으로 맞서고자 하는 곳이다. 도쿄의 야스쿠니신사와 내년 초 개관 예정인 부산의 일제강제동원역사관이다.
18일 오전 야스쿠니를 찾았을 때는 마침 추계예대제(가을철 정기제사)였다. 신사로서는 가장 중요한 날이라고 한다. 예상보다 조용했지만 기자들이 본전 옆으로 몰려들어 각료와 정치인의 참배를 취재하고, 신사 측이 본전 앞에서 일왕의 칙사를 극진히 맞는 모습을 보며 야스쿠니의 상징성을 실감했다. 정교 분리, 민관 불간섭을 얘기하지만 야스쿠니는 호국신사의 총본산으로 정치와 종교 사이의 그레이존에 있는 게 분명하다.
A급 전범들은 극동군사재판에서 혐의가 확정됐지만 그런 기록은 이곳에선 별로 중요치 않다. 신사 밖에서도 승자의 논리로 단죄한 불공정한 재판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야스쿠니 경내에 재판관 중 유일하게 A급 전범 전원의 무죄를 주장한 인도의 라다비노드 팔 판사를 숭모하는 비석이 서 있는 이유다. A급 전범도 그저 한 명의 ‘애국자’로 기억하자는 것이다. 기록은 점점 빛이 바래는데 기억은 오히려 더 또렷해지고 아름다워지는 곳, 바로 야스쿠니신사다.
24일 둘러본 일제강제동원역사관은 부산 남구 부산문화회관 위쪽 언덕에 있다. 널찍한 터에 자리 잡은 번듯한 7층짜리 건물이다. 외관도 강제동원이라는 테마에 걸맞게 조형미가 있으면서도 장중하다는 느낌을 준다.
역사관은 1938년 일제가 강제동원령을 내린 시점부터 1945년 광복될 때까지 군인 군무원 노무자 위안부 등으로 강제동원됐던 780만 명의 신산(辛酸)을 전시할 예정이다. 자료와 증언 등은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가 10년 동안 수집한 것들이다. 내년 6월 위원회의 업무가 끝나면 6월에 출범한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운영과 관리를 넘겨받는다.
전시물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지하 1층부터 지상 2층의 넓은 벽면 전체를 249장의 크고 작은 사진으로 장식한 코너였다. 사진 속 인물들은 군복을 입고 서 있거나, 노역을 하거나, 단체사진 속에서 말없이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웃는 사람은 없었다. 빛바랜 흑백 사진들은 아픈 기억을 또렷한 기록으로 바꿔놓고 있었다.
역사관은 개관이 지연되고, 부실 공사까지 드러나 비판을 받고 있다. 보수를 하고 있으니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다. 중요한 건 콘텐츠다. 건물은 좋은데 왠지 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배추 고갱이처럼 단단히 채워야 할 것이다.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들일 방책도 절실하다.
한일 간에 기억과 기록의 충돌은 계속될 것이다. 일본은 기록을 넘어 기억으로까지 무장하려 한다. 일본의 변신을 추동하는 것은 그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과거의 기억이다. 우리는 어떤가. 기억에 매달린 나머지 기록의 힘을 깨닫는 게 너무 늦어버린 것은 아닌지. 부산의 역사관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심규선 대기자 kss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