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 털어 헌신 9년… 야구 꿈나무의 ‘키다리 할아버지’
○ 리틀야구팀 20개서 160개로 늘려
고려대와 한일은행 야구선수 출신인 한 회장이 연맹 수장에 오른 건 2006년의 일이었다. 성동고 동창인 당시 하일성 한국야구위원회(KBO) 사무총장과 이광환 KBO 육성위원장의 권유가 있었다. “회장 취임 며칠 전 리틀야구를 보러 갔는데 화장실에 구더기가 기어다니더라. 학부모와 심판은 멱살잡이를 하고 대회는 감독들이 10만 원씩 내서 치르고 있었다. 괜히 맡았나 싶었다.”
팀과 대회가 늘면서 국내 리틀야구 수준도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한 회장은 해외 원정을 갈 때 출장비는 자비로 처리하고 대신 그 비용으로 코치를 연구원으로 동행하게 해 전력 향상을 꾀했다. 월드시리즈 기간에 그는 홍보맨으로 변신해 승전보를 언론사에 알리는 일에까지 팔을 걷어붙였다. 세계 제패는 거저 얻어진 게 아니었다.
○ 딸은 골프, 사위는 야구, 그럼 외손자는?
한 회장은 한때 ‘희원이 아빠’로 통했다. 일본과 미국 투어에서 모두 신인상을 차지한 골프선수 한희원(36)이 그의 둘째 딸이다. 국내 아마추어 시절 48승을 거두고 일본에서 대학을 마친 한희원은 2001년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투어 진출 후 통산 6승에 상금만 700만 달러(약 74억 원)를 넘겼다. 한희원의 남편인 손혁은 공주고 시절 박찬호, 임선동, 조성민 등과 투수 황금 세대로 이름을 날리다 고려대를 거쳐 LG 두산 등에서 뛴 뒤 TV해설가로 활약하고 있다. 스포츠 스타 커플인 이들은 2003년 결혼 후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들을 두고 있다.
한희원이 박세리, 김미현, 박지은 등과 한국 여자골프의 해외 무대 개척자로 성장한 데는 ‘원조 골프 대디’의 헌신이 있었다. 베스트 스코어가 4언더파일 정도로 골프 고수였던 한 회장은 “희원이에게 골프 시키기 전에 수영부터 3년을 가르쳤다. 근육 발달에 효과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희원은 체계적인 조기 교육 속에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야구 선수 사위를 본 배경에도 아버지가 있었다. “희원이가 고교 2학년 때 고려대 야구부의 오대산 극기 훈련에 보낸 적이 있다. 그때 혁이를 처음 봤다. 나중에 희원이를 데리고 미국 시애틀에 갔을 때 우연히 혁이도 거기에 있었다. 운명이 아닌가 싶었다. 희원이가 혁이랑 결혼하겠다고 해서 미국에서 우승하면 허락한다고 했더니 바로 우승하더라(웃음).”
문득 외손자에게는 어떤 운동을 시킬지 궁금했다. 한 회장은 “아이 마음이 중요하지만 야구 하면 좋겠다. 한국 남자 골프선수는 쉽지 않아 보인다”고 했다.
○ 내일을 향해 던져라
훈훈한 가족 얘기 속에 푸근한 할아버지로 돌아갔던 한 회장의 눈빛이 다시 이글거렸다. 월드시리즈 우승 이후 과제를 물었을 때였다. “아직 갈 길이 멀다. 꿈을 이뤘으니 이젠 현실이 될 수 있도록 문화체육관광부, 지방자치단체, 대한체육회 등의 지원이 절실하다.”
전용구장 확충이 시급한 과제다. 한 회장은 화성시와 리틀야구 전용구장 건설 양해각서(MOU)를 맺었다. 한 회장은 “전용구장 6개면이 완공되면 연령별 경기가 가능해진다. 학생 선수들의 학습권도 보장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연맹은 내년 월드시리즈에 대비하기 위해 대만, 일본 전지훈련도 계획하고 있다.
“승패에 연연하지 말고 아이들이 즐겁게 놀 수 있는 분위기가 중요하다. 부모의 욕심은 자녀의 장래에 큰 도움이 안 된다. 야구장은 놀이터이면서 학습의 현장이다.” 어느새 어둠이 깔리고 야간경기를 위해 야구장 조명탑이 환해졌다. 3시간을 넘긴 인터뷰도 좀처럼 끝날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