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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세상을 바꿉니다/잊지 못할 말 한마디]설, 난 너를 믿어

입력 | 2014-10-27 03:00:00

뮤지컬 제작자 팀 맥팔레인





설도윤 설앤컴퍼니 대표

2003년 국내 최초로 빅탑씨어터에서 뮤지컬 ‘캣츠’의 막을 올렸다. 경기 수원에서의 성공적인 트라이아웃을 거쳐 부산으로 내려갔다. 거대한 텐트 안에 완벽한 냉난방 시설과 최고 수준의 음향 시설 등을 갖춘 것은 물론이고 지난 20년 치의 강우량과 풍속, 기온, 습도 등 기상 데이터를 분석해 안전에도 대비한 1800석짜리의 공연장을 만드는 것은 설레고도 가슴 벅찬 일이었다.

모든 것이 완벽한 텐트극장에서 공연이 시작됐고, 우리 뮤지컬 역사를 새로 쓸 ‘빅탑 캣츠’에 대한 자부심도 컸다.

티켓도 매진,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공연 시작 이틀 만인 9월 12일 태풍 매미는 야속하게도 텐트극장을 휩쓸었다. 매미가 지나간 공연장은 골조만 남긴 채 처참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남아 있었다.

호텔 지하에 대피했다가 다음 날 아침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나와 스태프들은 하루아침에 흉물이 된 공연장을 보며 참담한 표정으로 넋을 놓고 있었다. 120여억 원을 들여 완성한 공연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300여 명의 스태프도 하루아침에 일자리가 없어졌다.

배우들과 스태프는 우왕좌왕하고, 나 역시 참담한 심정만 들 뿐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선 캣츠 빅탑씨어터 작품을 총괄하는 호주 측에 문의해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지 의논해야 했다. 그때 난 스태프들에게 “빠른 시간 내에 다시 공연을 할 테니 나를 믿고 따라 달라”고 했다. 체류 비용을 아껴야만 했던 나는 그들에게 “공연을 다시 할 수 있을 때까지 호주로 휴가를 가라”고 부탁했다.

모든 상황을 설명하고 내 뜻을 전하자 당시 RUG(리얼리유스풀그룹) 아시아 총괄 회장이었던 팀 맥팔레인은 “설, 난 너를 믿어”라고 답했다. 그러고는 스태프들에게 “미스터 설이 하라는 대로 하라”고 지시했다.

이런 상황에서 날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니. 1990년대 중반 ‘오페라의 유령’을 하기 위해 처음 그를 만났을 때 “한국이라는 나라도 뮤지컬을 하느냐”며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그가 날 믿는다고 말해준 것이다.

그의 한마디는 내게 엄청난 믿음과 힘과 용기가 됐다. 나 또한 그 덕분에 시간은 좀 더 걸리겠지만 반드시 공연을 올리겠다고 매체와 지면을 통해 관객들에게 약속을 했다. 맥팔레인이 나를 믿어주었듯 그 다음 공연 예정 장소였던 대구의 관객들도 예정보다 2주나 늦어졌지만 공연을 기다려 주었고, 환불을 원하는 관객은 없었다.

공연이 정상화되려면 10주 이상 걸릴 것이라는 호주 본사의 예측을 깨고 6주 만에 공연을 재개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 기적은 날 믿어준 팀과 또 나를 믿고 기다려준 관객이 함께 이루어낸 것이었다.

당시의 태풍으로 인한 빅탑 사건은 CNN을 비롯한 여러 언론을 통해 세계에 전해졌고 브로드웨이에까지 알려지면서 난 일약 유명 인사(?)가 됐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죽지 않는다는 뜻의 ‘꼬리 아홉 개 달린 고양이’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프로듀서는 신뢰를 주는 것이 생명이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작품의 제작에 참여해야 하는 스태프와 배우, 투자자, 협력사 등 모두에게 믿음을 주어야 공연이 제작될 수 있고, 관객에게도 제작자의 확신이 전해져야만 공연이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설, 난 널 믿어’, 이 말은 나에게서 기적을 이루어냈다.

그의 말 한마디가 수많은 실패와 시련을 견디고 지금까지 이 일을 즐겁게 하는 계기가 됐다. 나 역시 그와 함께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믿고 함께하고 있다.

설도윤 설앤컴퍼니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