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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이정렬의 병원 이야기]어느 의사, 어느 병원에 가도 동일한 진료 받을 수 있다면

입력 | 2014-10-28 03:00:00

이정렬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의료란 고도의 판단력이 집약된 행위인 만큼 의사마다 모두 똑같을 순 없다. 그러나 의료도 기술이므로 병에 따라, 환자에 따라 공통성을 뽑아내어 표준화하는 작업은 여러모로 중요하다. 동아일보DB

이정렬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재벌 기업에 대한 쏠림 현상도 심하지만 대형병원에 대한 쏠림 현상도 심하다는 것은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어느 병원 어느 의사한테 수술을 받건 환자 입장에서 동일한 결과를 얻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의료의 경우 기술의 영역이므로 어느 정도까지는 표준화가 가능하다. 지난주 열렸던 대한흉부외과학회에서도 표준진료지침 특별 강연이 있었다.

‘표준화’는 환자들이 언제 어느 병원, 어느 의사에게 진단이나 치료를 받건 과학적으로 검증된 방법을 선택하고 이를 통해 안전하고 일정한 치료 결과를 보장하는 것이다. ‘의료 서비스’는 인간의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에 의료 선진국들도 진료 표준화 노력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진료지침 표준화가 이뤄지면 과잉 진료도 막을 수 있기 때문에 선진국들은 표준화와 함께 합의를 통한 의료비 부담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적정 진료’ 개념도 함께 도입하고 있다.

‘적정화’란 건강보험 재정 한계 내에서 ‘최적의 의료자원 배분 원칙’을 수립하는 것이다.

현재까지 한국 의료계는 나름대로 ‘표준’과 ‘적정’을 슬기롭게 지키면서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의 질과 환자 안전을 도모하려 애써 왔다고 생각한다. 최근에는 이를 평가하는 보건복지부 산하 ‘의료기관평가 인증원’(2010년 10월 26일 개원)까지 만들어져 활동하고 있다. 특히 대한의학회의 임상진료지침 연구사업단의 임상진료지침 개발 사업에 관심과 격려를 보낼 만하다. 최신의 과학적 정보를 탐색 분석하여 이를 토대로 환자의 진료 가이드라인을 체계적으로 만드는 첫 시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료 분야라는 것이 워낙 방대해 인증원만의 노력으로는 역부족이다. 국가 차원에서의 지원이 시급한 이유이다.

의료 표준화는 최근까지의 임상 결과를 철저히 분석하고 종합하여 지침을 수립한다는 점에서 ‘근거중심의학(EBM·evidence based medicine)’이라 이야기하기도 한다. 교과서나 논문을 적당히 종합하여 마련한 단편적인 지침이나 소책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이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한국 의료계의 현실을 고려할 때 우선은 대형병원들에 축적된 노하우와 결과 자료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대형병원 의사들은 대부분 의학적으로 옳다고 생각되면 비용이 아무리 많이 들더라도 최첨단 치료를 환자에게 적용하려는 고집스러운 원칙을 고수한다. 따라서 현존하는 최고 품질의 최신 치료 방법이 무엇인지 만들어 낼 잠재력이 있다. 대형병원의 자료를 바탕으로 ‘최상의 표준진료’를 정의하고 이를 기준으로 두고 건강보험 재정 여력을 고려하면서 환자-병원-정부 합의하에 ‘한국형 적정진료’ 범위를 만들어 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선천성 심장질환 환자를 예로 들어 보면 같은 병원 안에서도 과(科)와 의사에 따라 환자에게 어떤 검사를 얼마나 했는지, 어떤 방식으로 수술했는지, 입원 기간 동안 어떤 검사를 얼마나 자주 했는지, 수술 후 외래 관찰은 어떻게 얼마나 했는지 등등이 천차만별이다. 같은 환자를 두고 한 병원 안에서도 이렇게 다른데 병원들 간의 차이는 얼마나 더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다행스럽게 훌륭한 치료 성적들이 있으며 비록 들쑥날쑥하지만 축적된 자료들이 있기 때문에 연구와 합의를 통해 ‘표준 진료 패턴’을 만드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의료 표준화 지침이 만들어지면 대외적으로는 의료 분야 국가경쟁력을 비교 평가할 수 있을 것이고 대내적으로는 의료비 원가 산정을 하게 됨으로써 신뢰와 공감이 가능한 의료수가 체계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국가가 보장할 수 있는 진료비 범위와 한계를 소상히 밝힐 수 있고 이에 대해 환자 의료계 정부가 합의하면 ‘한국형 적정진료 시스템’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침을 만들기 위한 구체적인 전제조건을 몇 가지 짚고 싶다. 우선 ①대한의학회의 전문적인 임상진료지침 개발 노하우와 현장(대형병원)의 실제 환자 진료 패턴에 대한 자료가 만나야 한다. ②이 과정에서 건강보험공단과 정부도 적극적으로 동참했으면 한다. ③적정진료와 건강보험 부담의 주체와 부담의 한계에 대해 국민들도 함께 인식하고 이를 통해 건강관리 차원에의 국민 통합도 이루어졌으면 한다.

이런 노력의 결과물로 탄생할 한국의 의료서비스는 미국형도, 영국형도, 스웨덴형도 아닌 지구상 유일한 ‘한국형 표준진료와 적정진료’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이정렬 서울대병원 흉부외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