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두 스포츠부 차장
1995년 말, 그는 일본 진출을 원했다. 그러나 팀은 그를 놓아줄 의사가 없었다. 당시는 선수의 권리보다 팀의 권한이 지금보다도 훨씬 강할 때였다. 그러자 이번에도 팬들이 나섰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팬들은 전화 시위 등으로 팀에 압력을 넣었다. 결국 팀은 두 손을 들었고, 그는 일본 팀에 입단했다. 일본에서도 이어진 그의 눈부신 활약에 그의 팬 층은 고향과 팀을 초월했다. 단언컨대 그는 대한민국 운동선수 중 가장 안티 팬이 적었던 선수였다.
그가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뒤에도 팬들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고향 팀이 아닌 다른 팀을 맡았지만 문제가 되지 않았다. 3년 전 고향 팀 감독으로 자리를 옮길 때는 고향 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의 해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도 그가 놓친 게 하나 있다. 팬과의 소통은 둘째 치더라도 그가 선수와의 소통에도 실패했다는 것이다. 평소 소통이 원활했다면 그의 해명대로 그 선수가 그의 말을 곡해했을까. 선수들과의 불통은 성적 부진으로 이어졌고, 그것은 팬들의 비난을 가져왔다.
요즘은 많이 퇴색했지만 10년 전까지만 해도 지도 스타일에 따라 감독을 분류하는 일이 흔했다. 용장(勇將) 지장(智將) 덕장(德將) 등이다. 이들의 서열을 매기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용장 위에 지장, 지장 위에 덕장, 덕장 위에 복장(福將)이 있다’는 것으로 결국 복 있는 감독이 최고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요즘 잘나가는 감독들을 보면 복장보다는 통장(通將)이 시대의 흐름이 됐다. 선수와의 소통(疏通)이 감독의 가장 중요한 역량이 된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불행했다. 프로선수가 된 이후 그가 모셔온 감독들은 모두 한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용장들이었다. 그들은 선수들을 강하게 몰아붙이며 최고의 성적을 거뒀다. 선수와 코치 시절 그에게 그 감독들은 미래 자신이 돼야 할 롤 모델이었다.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봐 온 한 야구 관계자는 “코치 시절까지만 해도 그는 선수들과 소통을 잘했다. 그러나 감독이 된 이후 선수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코치와 감독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더라도 변화의 흐름을 읽지 못한 것은 그의 불찰이었다. 그는 ‘국보급 투수’로 불리는 선동열 전 KIA 감독이다.
이현두 스포츠부 차장 ruch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