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이기호 소설가
때는 단풍철인지라 하늘은 동해처럼 깊고 푸르게, 사방팔방으로 퍼져 있었지요. 자취방 창문으로 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다가 잠깐 외롭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서른일곱 살인데, 애인도 없이 휴일마다 늘어진 추리닝 바람 그대로 자취방 이곳저곳을 배영으로 돌아다니는 제 모습이 한심스러워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디 잠깐 나가 볼까,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저는 택배 기사거든요. 내일 또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이리저리 뛰어다닐 일을 생각하면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어요. 나간다고 없던 애인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주머니 사정도 뻔하니 그냥 자취방에서 TV나 보다가 저녁엔 또 비빔면이나 끓여 먹어야겠다,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재석 씨, 별일 없으면 저녁이나 먹으러 건너와요.”
아,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는 거지요. 마트 계산대 아르바이트를 하는 민철이 와이프가, 손도 크고 어깨도 넓어 친구들끼리 ‘백곰 마나님’이라고 흉을 보곤 하던 민철이 와이프가, 꽃게탕을 끓여 놓았다고, 수저 하나만 놓으면 된다고 빨리 넘어오라고 하니(제 자취방에서 민철이네 빌라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도 안 되거든요), 없던 허기도 다시 생겨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마누라가 애교 없는 것까진 참을 수 있었는데, 허리가 없어지니까 못 참겠더라구. 민철이는 종종 그렇게 한숨을 쉬곤 했지만, 제가 보기엔 다 배부른 소리 같았습니다. 꽃게탕을 함께 먹으니 허리가 없어지는 건 당연한 일…. 저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입고 있던 추리닝에 야구모자 하나 달랑 쓰고 찾아간 민철이네 집은, 그러나 분위기가 영 아니었습니다. 식탁엔 분명 꽃게탕이 놓여 있었지만, 민철이 표정이 흡사 도마 위 해삼처럼 축 늘어져 있었거든요. 하지만 저는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오랜만에 꽃게탕 냄새를 맡으니 마음이 절로 푸근해졌습니다. 민철이 와이프도 그런 제게 식기 전에 어서 먹으라고, 맥주까지 한 잔 따라서 건네주었습니다.
민철이 앞에서 막 꽃게탕을 떠먹으려는 순간, 우리의 ‘백곰 마나님’이 연신 웃으면서 제게 물었습니다.
아하하하… 술이라뇨? 저는 어제 열 시까지 트럭 몰고 다니다가 집에 들어와서 씻지도 못한 채 뻗은 걸요…. 저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그 짧은 순간, 민철이와 눈이 마주쳤고(민철이는 아주 재빠르게 눈을 깜빡였지요), 그래서 이렇게 대답하고 말았지요.
“아이고, 말도 말아요. 어제 정말 엄청 마셨어요.”
저는 괜스레 쓰리지도 않은 배를 비벼가며 억지웃음까지 지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꽃게탕을 떠먹으려고 했는데… 민철이 와이프가 또다시 이렇게 물어왔지요.
“그래요? 근데 어디서 마셨는데요?”
“아이고, 제가 어제 필름이 끊겨서… 집에도 제대로 못 갔다니깐요.”
저는 나름 최선을 다해 말한 건데…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민철이 와이프 입에서 떨어진 소리는 ‘나가!’라는 말이었습니다. 아, 물론 저 말고 민철이에게요…. 민철이 와이프는 저한텐 ‘재석 씨는 식사 계속 하세요’라고 말했지만, 아하하하, 그게 어디 정말 먹으라는 소리인가요.
저는 집 밖으로 쫓겨난 민철이를 뒤따라 빌라 입구 계단에 쭈그려 앉았습니다. 저는 담배를 입에 물고 물어보았습니다.
“너, 어제 어디서 마셨다고 했는데?”
그러자 민철이는 풀 죽은 목소리로, 계단 아래만 내려다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자취방….”
에이 씨, 그냥 방에 있는 건데…. 저는 담배를 피우면서 계속 비빔면 생각을 했습니다. 얘를 데리고 가서 그거나 끓여 먹자, 하고 말이지요.
이기호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