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200일, 기억하겠습니다] 수색헬기 추락으로 숨진 소방관 가족-동료 3인의 100일 이야기
1일로 세월호 참사 발생 200일을 맞지만 구조활동을 하다가 숨진 희생자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미미하다. 헬기사고로 정들었던 동료를 잃은 강원소방본부 특수구조단 이수남 행정지원팀장(왼쪽 사진), 고 안병국 소방위의 부인 한모 씨(가운데 사진)와 민간잠수사 고 이광욱 씨의 어머니 장춘자 씨 등 유가족과 지인들이 모두 “세월호 희생자도, 우리도 잊지 말아달라”고 한목소리로 말했다. 춘천·남양주=홍진환 jean@donga.com·청주=신원건 기자
○ 전화번호 지우고 책상 치워도…동료 생각에 울컥
격납고 안은 고요했다. 소방헬기가 있어야 할 자리는 헬기 견인차와 강원소방본부의 25인승 미니버스 한 대가 차지하고 있었다. 강원소방본부 특수구조단 이수남 행정지원팀장(52)은 “닦고 조이고 기름칠 우리 헬기도, 헬기 탈 사람도 없어 다 정리해놨다”며 헬멧 들것 등 구조장비를 만지작거렸다.
“물건, 책상 다 치워버렸다고…. 생각 안 나겠냐고.” 김광수 1항공수색대장(57)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순직자들과 2년 이상 함께 호흡을 맞췄다. 정 소방령과는 군 복무 포함해 20년 동안 함께 하늘을 누볐다. 김 대장은 다섯 명의 휴대전화 번호도, 카카오톡 메시지도 남김없이 지웠다. 그래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홀로 담배 피우면 함께 담배 피우던 모습이, 술을 마시면 옛 추억이 떠오르니까 힘들어. 죄스럽고…”라며 가슴을 쳤다.
김 대장은 1997년 특수구조단 창설 후 17년 동안 한자리를 지켰다. 18명이 살을 부대끼던 사무실에는 이제 김 대장과 새로 온 정비사 1명, 행정계 직원 4명과 특수구조단장 등 7명만 남아 있다. 1항공수색대원은 김 대장 1명뿐이다. 그는 새 헬기 도입 업무를 맡아 이곳에 남았다. 그는 “다른 직원들은 9월 초 다 인사 조치했다. 여기 있는 게 힘들 텐데 잘됐지. 헬기도 없는데…”라며 업체에서 가져온 새 헬기 설명자료를 들여다봤다.
관사에서 함께 생활하다 보니 각자의 부모와 배우자, 자녀까지 한 가족처럼 살았다. 속사정도 잘 알았다. 달력을 보던 김 대장은 “내일(29일)이 안병국 정비사 첫째아들(7) 운동회라지? 초등학교 1학년인데 아빠 없이 잘 달리려나”라고 했다.
○ “소방관 말고, 경찰요”…장래희망 바꾼 아들
29일 오전 충북 청주시 소재 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일곱 살짜리 아들을 향해 “우리 아들 1등 해!”라며 손을 흔들던 고 안병국 소방위의 부인 한모 씨(38)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한 씨는 “유치원 운동회 때 남편이 자주 와서 함께 달리기도 했어요. 아이가 아빠와 추억을 많이 갖고 있는데 사고 이후로는 저에게 아빠 이야기를 안 해요”라고 했다.
한 씨는 8월 말 춘천을 떠나 이곳에 왔다. 아들이 “춘천 싫어.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있는 데(청주) 가자”고 해 이사를 했다. 한 씨는 “아들이 춘천 떠올리는 것도 싫어해 유가족 정기모임이나 행사 때 데려가지 못한다”고 말했다. TV에 헬기가 나오면 유심히 쳐다보는 아들을 볼 때면 울음을 속으로 삼키며 “아빠는 훌륭한 사람이었다”라고 말해야 했다.
사고 이후 한 씨는 주민센터 가는 게 가장 힘들다고 했다. 순직보상연금, 국가유공자 지정 등에 필요한 주민등록등본, 가족관계증명서 등 각종 서류를 수시로 발급받아 여러 기관에 제출해야 했다. 한 씨는 “죽은 남편 이름을 마주하고, 그 이름을 사용해 무언가 하고 있다는 미안함에 더 힘들다”며 말을 삼켰다.
소방헬기 사고 유가족들은 세상의 무관심이 힘들다고 했다. 한 씨는 “세월호 사고는 아직도 신문과 TV에 나오는데, 이 사고는 소식을 찾아볼 수가 없다”고 했다. 그나마 친정 부모와 아이가 있어 힘을 낸다는 한 씨는 “이은교 대원 어머니는 혼자 지내세요. 아무도 안 남았는데 주변의 관심이 없어 저희보다 더 힘들 겁니다”라고 했다.
“19년 전 남편도 사고로 세상을 떠나더니 하나 있는 아들마저 뭐가 급하다고 이렇게 빨리 데려가나요.”
27일 오후 서울 강서구 자택에서 만난 고 이은교 소방교의 어머니 최경례 씨(56)는 오래전 세상을 떠난 남편을 떠올렸다. 이 소방교는 아버지의 사고를 겪은 뒤 구조대원의 꿈을 키웠다. 최 씨는 “아들이 그래서 소방관이 됐는데 다른 사람 구하고 오다가 그런 일을 겪을 줄은 몰랐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최 씨는 최근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했다. 병원 조리사로 일했던 최 씨는 아들 장례 치르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 일자리를 잃었다. 사고 직후 지병인 관절염이 심해지고 최근엔 고혈압까지 생겨 생계가 막막한 처지다. 최 씨는 “집에만 있으면 아들 생각밖에 안 나니까 건강해져서 일하러 가고 싶다”고 했다.
주변의 관심이 멀어지면서 최 씨를 비롯한 유가족들은 아쉬움을 표했다. 세월호는 사고 후 특별법 제정 노력과 계속된 언론의 관심이 있지만, 헬기 추락으로 드러난 소방관의 열악한 상황 개선 문제는 여전히 관심 밖에 있기 때문이다. 고 박인돈 소방위의 부인은 “처우와 근무환경이 개선돼야 다섯 명의 죽음이 더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청주=최혜령 herstory@donga.com / 춘천=이건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