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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형무소서 온 쪽지… “각하, 저희들을 구해주십시오”

입력 | 2014-11-01 03:00:00

[憧憬 이종찬 회고록]〈11〉 박정희의 눈물




1967년 3월 구엔 반 티우 월남 국가지도위 의장과 환담 중인 이대용 주월 한국대사관 무관(대령). 그해 10월 민정이양과 함께 대통령에 당선된 티우는 이 대령과 육군지휘참모대학을 같이 다닌 동창이었다. 동아일보DB

사실 나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시절 전두환 대위를 만나본 이후 그가 보안사령관으로 취임할 때까지 거의 볼 일이 없었다.

10·26과 12·12 직후 근 20년 만에 그를 찾아간 것은 김재규 부장 시절의 특별 임무 때문이었다.

1979년 초 해외공작국에 근무하고 있던 나는 사무실이 석관동 청사였다. 갑자기 김 부장 수행비서인 박흥주 대령이 전화를 걸었다. “아무에게도 사전보고하지 말고 남산사무실에 다녀가기 바랍니다.” 나는 급히 시내에 볼일이 있다는 핑계로 남산 부장실로 갔다.

김 부장은 나를 보자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월남에 억류 중인 이대용 장군 외 2명에 대하여 그동안 많은 노력을 했지만 별반 성과가 없지 않았나? 각하께서도 몹시 고심 중에 계시네. 그래서 새로운 방향에서 접근해야겠네. 자네 아이젠버그에 대하여 알고 있나?”

“유대인 사업가라는 것은 알지만 그 이상은 잘 모릅니다.”

“그동안 오해를 많이 받아온 인물이지. 그러나 이번 공작에는 유용한 사람일세. 그 회사 서울사무실이 있네. 찾아가서 혹 본사에서 지시받은 것 없느냐고 타진해 보게. 단 한 가지 말해 둘 것은 오늘부터 시작하는 작업은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 되네. 차장, 차장보, 국장도 알 필요가 없네. 알아듣겠나?”

부장이 직접 지시하고, 보고받는 중대한 일을 나에게만 맡겨준데 대하여 마음속으로 우쭐하는 기분도 생겼고, 또 한편으로는 앞으로 어떻게 처신해야 되나 하는 걱정도 됐다.

“알겠습니다.”

다음 날 나는 서울 중구 쌍용빌딩에 있는 아이젠버그 서울사무실을 찾아갔다. 거기서 뜻밖에 고등학교 동창인 송경호 군을 만났다. 그는 이 회사에 10년이나 다닌 고참이었다. 다짜고짜로 물었다.

“혹 너희 본사에서 연락 온 것 없냐?”

그는 웃으면서 “동경사무실에서 이번 주말에 사람이 올 거야”라고 말했다.

이틀 후 전화가 왔다. “내일 10시 하얏트 호텔 000호실에서 미스터 엘리 데이비드를 만나봐라. 나는 이제 빠진다.”

다음 날 하얏트 호텔로 찾아갔다. 데이비드는 나에게 일본말을 아느냐고 물었다. 모른다고 했더니 그러면 영어로 말하자고 했다.

“우리 보스가 김 부장의 부탁을 받고 이미 행동을 개시했소. 하노이와 교섭이 시작되었소. 연락은 전화나 문서로는 안 되고 내가 직접 동경에서 오든지, 혹 선생이 동경으로 와서 만나서 이야기합시다.”

그는 나같이 훈련받은 사람 이상으로 신중하고, 주의 깊었다.

이대용 공사 일행이 베트남에 남게 된 것은 우리 부의 실책이었다. 월남전 말기, 당시 대사는 해군 제독출신 김영관이었고, 정보부 거점장은 육군 장군 출신의 이 공사였다. 주월대사관 무관으로도 근무했던 이 공사는 월남 말기의 대통령, 구엔 반 티우와 미 육군참모대학 동기생이었다.

미 대사관이 마지막 철수를 결정하던 날, 김 대사는 일부 공관직원들과 함께 철수정보를 확인하려고 갔다가 그 자리에서 미군의 호의로 철수했다. 더이상 머물 수 없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공관장이 제대로 공관의 철수명령도 전달하지 못한 채 일부만 철수하는 결과가 되었다. 나머지 직원들은 지시를 기다리며 공관에 잔류하고 있었다.

이 공사는 대통령 궁으로 가서 마지막 정보를 수집하고자 했다. 길이 엇갈렸다. 피란민 행렬로 교통은 마비됐고, 미 대사관의 마지막 헬기는 떠난 상태였다.

월맹군은 사이공을 점령한 후 즉각적으로 공관직원 전체를 구속, 억류하였다. 빈 협정에 따라 대부분 석방했지만 이 공사와 수행원인 안희완 서기관, 경찰에서 파견한 서병호 경무관 등 안보직 공무원은 풀어주지 않았다.

한때는 이 공사 일행을 북한으로 넘기기 위한 공작도 진행되었다. 그들은 때로 협박도 하고, 회유도 했다. 그 과정에서 상상 이상의 비인간적인 대우도 받았다. 북한 노동당 제3호 청사(우리나라 국가정보원에 해당) 요원들이 들이닥치기도 했다. 그들의 집요한 설득과 회유에도 이 공사 일행은 완강하게 버티었다.

한편 본부에서는 어떻게든지 이들을 구출하기 위한 공작을 진행했다. 우선 사이공에 남아있던 프랑스대사관 라인을 통하여 이순흥 교민회장과 연락을 취했다. 이 회장은 침착하고, 판단이 정확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자금을 주어 이 공사 일행을 찾아낸 다음 연락망을 구성해달라고 부탁했다. 약 1년이 지난 후 이 공사 일행이 찌하 형무소에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들은 형무소에서 매일 어망을 짜는 일로 일과를 보내고 있었다. 하루는 이 공사가 어망을 짜다 남은 실로 조그마한 장바구니를 만들어 이순흥 회장 편에 보내왔다. 그 장바구니에는 작은 종이로 ‘대통령 각하 조속히 저희들을 구해주십시오’라는 쪽지가 숨겨져 있었다.

김 부장은 부리나케 이 쪽지와 장바구니를 박정희 대통령에게 들고 갔다.

박 대통령은 이 공사를 잘 안다. 한때 부하로 데리고 있었다. 쪽지를 받고 묵묵히 있던 박 대통령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김 부장!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들을 살려내시오.” 단호한 명령이 떨어졌다.  
▼ “北에 끌려가느니 차라리 권총으로 자결” ▼

월남 철수 美 헬기 놓친 이대용 공사


“와타나베 씨, 고맙습니다. 나는 북한에 끌려가 대한민국 외교관으로서 명예를 더럽히는 것보다는 확고한 국가관, 사생관에 입각해 자결할 결심입니다. 제 결심은 아무도 변경시킬 수 없습니다.”

월남이 패망한 다음 날인 1975년 5월 1일, 사이공 시내 그랄 병원에 피신해있던 이대용 공사는 자신을 찾아온 일본 대사관의 와타나베 참사관에게 그렇게 말했다. 일본은 이미 ‘베트남 민주공화국(월맹)’과 수교협상을 진행 중이었고, 와타나베 참사관은 좌익은 아니었지만 북한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거물급 작가 마쓰모토 세이초(松本淸張)의 사위이기도 했다.

그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이 공사를 찾아와 들려준 이야기는, 예상은 했지만 충격적이었다. “북한이 베트남 공산정권과 협의하여 그랄 병원에 피신 중인 한국 외교관 8명 전원을 평양으로 끌고 가겠다고 합니다. 각오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공사는 회고록에서 당시 심경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이 쉰이면 살만큼 살았다. 언젠가는 필연코 가야 할 죽음의 길, 이제 그 시기가 온 것이다. 나는 권총을 꺼냈다. 38구경 5연발 리볼버 권총이다. 실탄 5발이 장전돼 있다. 머릿속이 탁 튀며 ‘앵∼’하는 소리가 나는 듯했으나 마음은 가을 하늘처럼 맑았다. 그래, 갈 때가 온 것이다. 미련 없이 가야 한다.”

김영관 대사가 미 대사관 헬기로 먼저 떠나고, 이 공사 일행과 교민들이 뒤처지게 된 상황에 대해서는 보는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 평가가 있을 수 있다. 상황은 누구 잘못을 따지기 어려울 만큼 급박했다.

또 이 공사는 철수본부장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나는 육군대학에서 철수작전 교관을 3년간이나 지냈다. 우리나라에서 서울 철수 작전 계획을 최초로 작성한 참모는 바로 나였다. 그런데 참으로 어이없는 실책을 했다.”

하지만 이종찬은 김영관 대사의 행동에 대해 “요즘 그때 일을 생각하면 (선장이 먼저 배를 버리고 탈출한) 세월호 사건이 오버랩된다”고 했다.

여하튼, 하루 전날인 4월 30일 박정희 대통령은 김동조 외무장관으로부터 김 대사 일행이 무사히 철수했다는 보고를 받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박정희=“김 대사 들어오거든 즉시 다른 곳에 대사로 내보내시오.”

김동조=“지금은 자리가 나지 않습니다.”

박정희=“거 왜 있잖아. 칠레에 가 있는 한병기를 불러들이고 거기 내보내면 되지 않소?” 한병기 대사는 박 대통령의 사위, 그만큼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이튿날 이대용 공사 일행이 탈출하지 못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박 대통령은 김 대사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김 대사는 이후 야인으로 지내다 1987년 12월 대선 직전 ‘군의 정치적 중립’을 주장하면서 김영삼(YS) 후보 진영에 합류한다.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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