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라노 시게모리
롤랑 바르트의 ‘기호(記號)의 제국’을 읽고는 더욱 놀랐다. 일본 전통 인형극 분라쿠(文樂)를 보기 위해 기어이 일본에 가서 직접 관람하기도 했다. 18세기 두 연인의 정사(情死)를 다룬 ‘소네자키신주(曾根崎心中)’였다. 인형의 키는 1m 정도이고 손, 발, 입은 물론 눈꺼풀까지 움직인다.
흔히 인형극이라면 인형을 조종하는 사람이 숨어 있게 마련인데, 여기서는 인형을 조종하는 세 사람의 숙련된 인형사가 그대로 무대에 등장해 인형과 같이 걷고 뛰고 움직인다. 검은 옷에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어찌 보면 인형의 그림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 중의 리더는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맨얼굴로 인형을 조종한다. 아무런 분장도 하지 않은, 이 수석 인형사의 얼굴은 무심하고 무표정하다. 엄청난 무대 위에서 표정 없이 무심하게 인형을 놀릴 수 있다는 것이 아마도 굉장한 수련의 결과인 듯하다.
서양 연극과 달리 분라쿠는 연극의 프로세스 일체를 드러내 보이며 그 행위가 연극이라는 것을 전혀 감추지 않는다. 가히 브레히트의 소격(疏隔) 효과이다. 그러나 롤랑 바르트는 더 근원적인 문제로 올라간다. 만일 조종자가 숨어 있지 않다면 과연 당신은 그를 신격화할 수 있겠는가? 얼핏 푸코의 권력 문제까지도 연상시키는 구절이다.
가장 최근의 놀라움은 들뢰즈가 ‘감각의 논리’에서 “일본인들은 알고 있다. 우리 인생은 고작 풀잎 하나 알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을”이라고 쓴 구절을 읽고서였다. 아마도 하이쿠(俳句)를 언급하는 듯한 이 구절에서 일본 미학의 정신성에 대한 들뢰즈의 존경심이 문득 묻어 나왔다.
우리가 일본 문화의 부정적인 한 면만을 계속 젊은 세대에게 교육시킨다면 일본과의 싸움은 백전백패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