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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이재열]길을 잃어버린 중산층

입력 | 2014-11-03 03:00:00


이재열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지난해 세계은행 발표에 따르면 한국인의 1인당 명목소득은 2만6000달러, 구매력 기준으로는 3만3000달러를 넘겼다. 상대적으로 싼 물가 덕분이다. 한국인의 살림살이는 프랑스나 일본에는 조금 뒤지지만 영국이나 이탈리아와는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한국인의 자의식은 ‘불안한 서민’이고 선진국은 먼 나라 이야기다. 돌이켜보면 지난 수십 년 경제성장의 ‘밀물효과’는 의식주 같은 물질재(material good)의 절대적 결핍을 해결하는 데 확실하게 기여했다. 모두가 중산층이고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의 문화’가 넘친 1980년대의 계층적 자신감은 정치 민주화도 이끌어냈다.

그러나 이제는 상대적으로 제한된 ‘지위재(positional good)’를 둘러싸고 경쟁하다 보니, 공급을 늘린다고 해결되지 않는 일이 대부분이다. 곧 대학 정원이 남아돈다는데 명문대 입시는 더욱 치열해졌고, 전국 주택이 10%나 남는다는데 젊은이들이 대도시에서 전세 구하기는 훨씬 어려워졌다. 국민 행복하자고 한 성장의 결과, 자살률은 세계 최고, 행복감은 바닥이니 ‘풍요의 역설’이요, 직선제의 결과가 정치에 대한 분노와 냉소니 ‘민주화의 역설’이다.

1997년의 외환위기는 분기점이었다. 하루아침에 빈곤층으로 추락한 이들은 지옥을 경험했고, 추락을 비켜간 중산층도 ‘생존자 증후군’에 시달렸다. 이제 베이비붐 세대는 생산적 일거리가 없는 ‘퇴직 후 30년’이 두렵고, 그 자식 세대는 어떻게 불안과 평생 동거할 수 있을지 고민스럽다. 과거에도 실업이나 질병 등의 위험이 있었지만, 기댈 곳이 있었다. 그런데 비빌 언덕이 되어주던 확대가족은 빠르게 해체되었고, 음식을 나누던 훈훈한 골목은 층간소음으로 칼부림하는 아파트촌으로 바뀌었다. 반면에 그 자리를 대체할 정부의 복지정책은 미덥잖다.

결과는 과도한 위험 회피다. 젊은이들은 결혼, 출산, 창업을 기피하지만, 9급 공무원시험에는 20만 명씩 몰린다. 개인으로선 합리적일 수 있으나, 국가 수준에서는 노동력 부족과 성장 잠재력 저하라는 재앙을 잉태한다. 젊은이들의 창조적 실패를 허용할 위험관리제도가 없는 사회에서, 능력 있는 부모만이 유일한 ‘엔젤’ 자본가다. 주식 투자에 올인(다걸기)하든, 창업을 하든, 자녀에게 ‘실패해도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는 부모만이 ‘진짜 중산층’이 되었다.

끊임없이 타인과의 비교를 강요받는 소셜미디어 시대의 젊은이들은 ‘지질하게 사는 것’을 인생의 실패로 여긴다. 풍요의 시대에 성장한 젊은 세대는 헝그리 세대에 비해 쉽게 체념한다. 상대적 불평등이 큰 만큼 상승 이동의 사다리를 넘보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기업 취업이 안 되느니 아예 취업 자체를 포기한다. 집이 없어도 해외여행은 꼭 해야 하고, 희망 없는 배우자를 만나느니 아예 혼자 산다.

실업, 질병 같은 전통적 사회 위험에 대한 대비책이 충분치 않은데 새로운 위험은 몰려온다. 결혼이 늦추어지고, 1인 가구는 급증하며, 세계화와 빠른 기술혁신으로 교육과 재훈련의 필요성은 늘어나고, 돌봄의 손길이 필요한 노인도 급증하고 있다. 모두가 불안하다. 그러나 함께 문제를 해결할 준비는 안 되어 있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사회요, 명확한 비전을 제시하고 국민의 마음을 모아 합의를 끌어낼 통합적 리더십은 보이지 않는 모래알 사회다. 가장 심각한 것은 공정한 규칙에 대한 믿음의 부재요, 규칙을 만들고 집행하고 심판 역할을 하는 국회에 대한 불신이다. 그런데 권력을 나눠 갖는 개헌부터 하잔다. 부디 중산층의 행방부터 먼저 찾으시라. 사회맹(社會盲) 정치인들이여.

이재열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