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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혁신 ‘골든타임’ 2부]“밟고 올라야 살아남는다”

입력 | 2014-11-03 03:00:00

<2>사회에 뿌리박힌 갑을관계 (上) 비뚤어진 인식




《 한국 사회에서 ‘갑을(甲乙) 관계’는 단순한 계약 관계가 아니다. 업무의 영역을 넘어 사생활에서까지 갑이 을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특수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 도처에서 비정상적 권력 관계인 ‘갑을 문제’가 생겨난 까닭은 무엇일까.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각 분야 전문가들에게 그 이유를 들어봤다. 》

○ 일제강점기·산업화 거치며 내재화

갑을 문제가 공론화된 것은 최근이지만 그 뿌리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훨씬 이전이다. 상당수 전문가는 조선시대의 관존민비(官尊民卑·벼슬아치를 우러러보고 일반 백성은 낮추어 봄)에서 갑을 관계의 연원을 찾는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말하는 갑을 관계는 일제강점기에 그 뼈대가 완성됐다는 견해가 많다.

식민지 경험은 우리의 뇌리에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논리를 심었다. 일제의 철권통치와 민족 차별 분위기에서 식민지 백성들은 잘살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횡포에서 보호받기 위해 출세를 해야 했다. 전우영 충남대 교수(심리학)는 이와 관련해 “시스템이 약자를 보호하는 기능이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개인이 자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힘 있는 위치에 가려는 성향이 커진다”고 해석했다. 물론 이런 심리 이면에는 ‘출세하면 남에게 갑질을 해도 된다’는 논리가 자리 잡게 된다.

권위주의와 비정상적 갑을 관계는 사실 동전의 양면이다. 일본 역시 전통적인 갑을 관계로 사회적 진통을 겪어 왔다. 라경수 일본 가쿠슈인대 교수는 “일본에서는 갑을 관계라는 표현을 계약서 이외에는 사용하지 않지만 한국과 유사한 사회적 불평등 구조 자체는 일본 사회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의 갑을 논리는 집약적 경제성장을 이룬 산업화를 겪으면서 더욱 공고해졌다. 성장 중심적 사고가 자리 잡으면서 경쟁이 심화됐고, 여기서 뒤처진 낙오자를 ‘을’로 여기는 게 당연시됐다. 결과적으로 종전에는 가정을 제외한 가장 가까운 공동체로 여겼던 학교와 직장 내에서조차도 갑을 관계가 생겨났다. 인사조직컨설팅 전문가인 양진영 박사(심리학 기반 코칭그룹인 PBCG 소속)는 “같은 조직 내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서로의 관계를 갑을로 여긴다는 것은 그만큼 경쟁이 심하고 삶이 빡빡해졌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부당한 권력 관계가 ‘갑을 관계’로 정의되며 사회적 논의의 도마에 오른 것은 2000년대 초반부터다. 이때부터 선거구 구분이나 법률용어로만 쓰여 왔던 ‘갑’과 ‘을’이란 표현이 권력 관계를 의미하는 말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신율 명지대 정치학과 교수는 “2000년대 초반은 권위주의 타파와 함께 사회의 투명성을 높이자는 목소리가 주목받기 시작한 시점”이라며 “집약적 경제발전을 거치며 그동안 묵과돼왔던 일상적인 삶에서의 권력 관계에서도 권리를 찾기 위한 노력이 시작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여전히 ‘벤츠 검사’ ‘그랜저 검사’ 등 사회 고위층의 갑질 사건은 끊이지 않았다. 이에 대해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저서 ‘갑과 을의 나라’에서 ‘이렇게 일부 고위 공직자의 비위가 제대로 처벌받지 않는 현실을 지켜보면서 국민들의 무의식 속에 ‘갑’이 되면 떵떵거리고 살 수 있다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됐다‘고 분석했다.

○ ‘연못 속 고래’와 성과주의의 그늘

경제적 관점에서 갑을 문제는 ‘힘의 불균형’에서 주로 발생한다. 대기업과 하청 중소기업의 권력 차가 크면 클수록 을의 자율적 선택권이 작아지기 때문이다.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은 “국내 내수시장을 보면 작은 연못에 큰 고래 몇 마리가 살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라며 “과거 산업화 시대에 해외 기업과 경쟁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육성한 대기업들이 내수시장에서 시장 장악력을 무기로 연못에서 ‘갑질’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1990년대 말 외환위기와 2000년대 말 경기침체를 계기로 부각된 성과주의와 효율 우선주의가 을의 피해를 더 심화시켰다고 말한다. 이런 풍토는 ‘납품단가 후려치기’와 재고를 강제 할당하는 ‘밀어내기’ 등으로 나타났다. 현용진 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 교수(공정거래센터장)는 “언제든지 다른 하청업체로 대체될 수 있는 중소기업은 대기업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며 “이는 고유 개발능력 부재로 이어져 경쟁력 감소의 악순환을 부른다”고 말했다.

지나친 성과주의는 최근에 이슈가 된 서비스업 감정노동자의 문제로도 이어진다. 한인임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연구원은 “서비스업에서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고용주들이 종사자들에게 필요 이상의 친절을 강요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저절로 손님과 직원 사이에 ‘절대적’ 갑을 관계가 생겨났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갑을 관계의 제도적 해결은 아직도 요원해 보인다. 최근 공정거래위원회는 가맹점주에게 부당하게 광고비를 전가한 베트남 쌀국수 프랜차이즈본부 ‘포베이’에 과징금 부과 없이 시정조치만 내렸다. 이 업체는 드라마에 상호와 매장 모습을 노출하는 조건으로 맺은 광고 계약에 들어간 2억여 원의 비용 가운데 7000여만 원을 가맹점주들에게 일방적으로 부담하게 해 문제가 됐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갑의 횡포에 대한 감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거나, 갑질이 적발되더라도 솜방망이 처벌에 그치기 때문에 복종적인 갑을 권력 관계가 심화된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공정위가 2011년 1월∼2014년 9월 불공정행위를 한 기업에 내린 ‘경고’ 이상 행정조치 가운데 검찰 고발로 이어진 비율은 2.5%에 불과했다.

최고야 best@donga.com·권기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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