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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이성호]사이버팁라인

입력 | 2014-11-03 03:00:00


이성호 사회부 차장

8월 중순경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 수사관들이 경남 창원시의 한 가정집을 급습했다. 수사관들이 집주인 A 씨(46·회사원)의 컴퓨터를 켜자 무려 4만 건 가까운 아동음란물이 쏟아졌고 경찰은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A 씨를 입건했다.

아동음란물을 유포하거나 판매한 사람이 경찰에 적발된 사례는 종종 있다. 그러나 수만 건의 아동음란물을 단순 소지한 사람이 붙잡힌 일은 극히 드물다. 경찰이 A 씨를 알게 된 건 미국 국토안보수사국(HSI)이 한국지부를 통해 건넨 정보가 결정적이었다. 앞서 HSI는 6월 A 씨가 미국의 한 호스팅업체에 도메인을 개설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A 씨는 자신이 갖고 있던 수만 건의 아동음란물을 도메인에 게시했다.

그의 불법행위를 처음 발견한 건 돈을 받고 도메인을 개설해준 호스팅업체였다. 업체는 자사를 통해 만들어진 모든 도메인을 필터링하고 있었다. A 씨가 올린 아동음란물이 확인되자 업체는 발 빠르게 해당 도메인을 차단하고 그가 결제 때 사용한 신용카드 정보를 ‘사이버팁라인(CyberTipline)’에 신고했다.

미국은 연방법에 따라 온라인 서비스 사업자가 아동음란물을 발견하면 반드시 신고하도록 하고 있다. 이때 신고를 접수해 수사기관에 제공하는 곳이 바로 사이버팁라인이다. 국립 실종·착취아동센터(NCMEC)가 운영한다. 처음 설치된 1998년부터 지난해까지 약 200만 건의 관련 신고를 처리했다.

NCMEC는 민간 비영리기관이다. 사이버팁라인 역시 미 연방수사국(FBI) 이민세관단속국(ICE), 법무부 등 공공기관과 민간 사업자들의 적극적인 공조를 바탕으로 운영된다. 사업자는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 같은 유명 업체를 비롯해 호스팅업체,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개별 기업도 포함된다. 이들은 아동음란물 게시 여부를 수시로 확인해 사이버팁라인에 관련 정보를 제공한다.

한국에서는 민간 사업자가 자신의 정보통신망에서 아동음란물을 발견하면 즉각 삭제하거나 차단하도록 돼 있다. 그러나 수사기관에 게시자를 신고할 의무는 없다. 삭제나 차단에 비해 신고가 훨씬 ‘적극적 조치’임이 분명하지만 업계에서는 개인 사생활 침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미국에서도 비슷한 논란이 있다. 이 때문에 게시물을 일일이 들여다보는 대신 아동음란물의 디지털지문(Hash·해시)을 데이터베이스(DB)에 구축한 뒤 같은 게시물을 자동으로 걸러내는 방식으로 논란을 줄이고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2008년 6건에 불과했던 아동음란물 단속 현황은 지난해 2418건으로 급증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인터넷 메신저를 통해 낯 뜨겁다 못해 충격적인 아동음란물이 오가고 있다. 아동음란물 피해자의 나이도 점점 어려지고 있다. 이를 막는 것은 수사기관의 노력만으로 힘들다. 미국처럼 민간 사업자의 노력이 절실하다. 하루빨리 한국판 사이버팁라인이 탄생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성호 사회부 차장 stars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