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원 오리콤 부사장
요리와 여행을 좋아한다는 이 남자. 광고뿐 아니라 다양한 영역을 유연하게 넘나드는 박서원 오리콤 부사장은 스스로를 ‘크리에이터’라 정의한다. 남다른 환경과 성장기를 거치며 대한민국 1%의 세계와 밖의 세상, 양쪽을 경험한 것이 그의 강점이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고미석 논설위원
국내외 광고계에서 주목받는 박서원 빅앤트인터내셔널 대표(35)의 이력이다. 그는 두산그룹 박용만 회장(59)의 장남. 재벌 가문의 정규 경영 수업과 동떨어진 길을 개척한 그가 지난달 두산의 광고 계열사 오리콤의 광고 총괄 부사장으로 영입돼 화제를 모았다. 지난달 21일 서울 언주로 두산빌딩 내 오리콤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고교시절 나이트클럽 가려 막노동
“지금은 다시 조정에 들어갔다. 주가는 기대가 반영된 것일 수 있는데 올봄 주식가치가 상당히 저평가된 것과 맞물려 폭발적으로 오른 것 같다. 기분은 좋다. 부담도 되고.”
―독립 영역에서 성공했는데 합류한 이유는….
“광고·디자인회사 빅앤트(Big Ant)는 개인 사업이다. 최근 법인 전환하면서 저절로 계열사로 편입됐다. 내가 두산과 특수 관계라서. 계열 분리를 신청했으나 수월하게 안 풀렸다. 고민하던 찰나 오리콤에서 제안을 받았다. 빅앤트 대표를 유지하면서 오리콤 부사장을 겸직하는 거다.”
표지만 보고 책을 판단하지 말라는 서양 속담이 있다. 소림사의 무술 고수처럼 빡빡 깎은 민머리에 셔츠를 걷은 팔뚝에 새긴 다양한 문신들, 튀는 외모 때문에 ‘똘끼’ 넘치는 천방지축일 것으로 예상했으나 빗나갔다. 말과 행동이 차분하고 진중했다.
“고교 시절에 나이트클럽에 갈 돈을 벌기 위해 공사장 막노동까지 했다. 하지만 도의적으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스스로 지켰다. 부모님께 놀아서 걱정 끼칠 일은 있어도, 사고 쳐서 걱정 끼칠 일은 만들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담배는 해도 술과 외박은 안 했다. 요즘 강연을 자주 다닌다. 학생들이 고민을 상담해온다. 그러나 날 보면서 느끼는 희망이 있으면 괴리감도 크다. ‘저렇게 공부 안 한 사람이 지금은…. 그렇지만 저 사람은 환경이 받쳐주잖아’라는 엇갈린 마음. 나를 배울 필요는 없고 뭐가 됐든 가슴이 끌리는 일을 일단 해보라는 얘기를 해준다.”
좋아하는 일을 찾는 순간 사람이 달라졌다. 옛날에 논 것처럼 공부하면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과제물이 포스터 1장이면 100장을 만들고 100쪽짜리 책 1권이면 200쪽 책 3권을 제출했다. 교수들이 이렇게 독한 학생은 처음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그때 별명이 ‘미친 놈’이었다. 그는 “시행착오 없이 한 번에 원하는 길을 만나지 못했어도 방황했던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다고 믿는다”고 말한다.
사람과 경험에서 영감을 얻다
―SVA 2학년 때 회사를 만들어 반전(反戰) 포스터 ‘뿌린 대로 거두리라’로 대박을 터뜨렸다.
“1년 동안 무지막지하게 공부하니 2학년은 조금 쉬워지더라. 나이는 벌써 28세. 학교 밖 프로젝트를 하고 싶어 친구들을 모았다. ‘뿌린 대로 거두리라’는 빅앤트를 알리기 위한 전략적 광고였다. 팀원들 아이디어를 모은 끝에 ‘돌고 도는 것’을 이미지로 정했다. 마침 이라크 철군이 이슈였다. 저거다. 전쟁 반대 캠페인을 하자. 소총을 든 미군 병사 이미지를 구해 기둥에 붙여서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는 메시지를 표현했다. 광고를 만든 뒤 미국 전역의 반전 단체를 찾아다녔다. 30군데 문전(門前)박대를 당하고 한 곳에서 수락했다.”
―박서원 광고스타일의 핵심은….
“최대한 쉽고 강하고 재밌게 만들고자 노력한다. 복잡하게 설명하는 게 싫다.”
―영감이나 자극은 어디서 받나.
“사람이다. 사람과 대화하면서, 사람 구경하면서. 모든 건 사람이다. 또 하나는 직접 경험. 인터넷 검색, 그런 건 거의 안 하고 책도 많이 안 읽는다. 보고 듣고 느끼고 겪는 걸 훨씬 많이 한다.”
그는 “천성이 사람을 너무 좋아하고 사람과 함께 어울려 지내는 걸 좋아한다”며 군대 시절을 “힘든 점도 많았지만 의미 깊고 행복한 시간”으로 회상했다.
―광고를 하면서 느끼는 즐거움은 뭔가.
“다양성이다.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분야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나의 생각을 통해 누군가의 행동과 생각의 변화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아이디어로 한 대학교 화장실에 가정집 방문 같은 문짝을 달도록 했더니 학생들은 예전보다 훨씬 청결하게 사용했다.
‘광고인 박서원’을 세상에 각인시킨 반전 포스터 ‘뿌린 대로 거두리라’. 내가 겨눈 총이 결국 나를 향한다는 메시지가 울림 있게 다가온다.
―요즘 부모들은 창의성도 스펙처럼 키워주고 싶어 한다.
“창의력의 원천은 호기심이다.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에 의문을 품고 딴죽을 거는 거다. 창의력을 길러주고 싶으면 ‘이거 하면 안돼, 저거 하면 안돼’라는 말을 덜 해야 한다. 유치원생 20명에게 크레파스 연필 사인펜을 주고 ‘호랑이를 그리세요’ 해보라. 순식간에 빨간색 호랑이, 무지갯빛 호랑이가 튀어 나온다.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은 질문하느라 시간 다 보낸다. ‘펜으로 그리나요?’ ‘나 그림 그릴 줄 모르는데’ 등등. 내 안의 호기심을 가둔 결과다. 창의성은 키우는 게 아니라 보존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서 열 살짜리 딸 얘기를 꺼냈다. 나비를 그리라 했는데 종이는 백지였다. 나비가 어디 있냐고 물어보니 벽을 가리키더란다. 나비는 날아다니는 거라고 말하면서. 어린 딸처럼 그는 하루하루 마음 속 어린아이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지금까지 겪은 실패나 좌절이 있다면….
“건방질지 몰라도 나 스스로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건 없다. 내 어렸을 적 모습을 실패라고 말할 사람도 있지만 그게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없었을 거다. 지금 내가 잘하고 있으면 그때의 교훈이 나를 만든 거 아닌가. 유일하게 실패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결혼? 이혼했으니까.”
―광고 이외에 브랜드 컨설팅, 패키지 디자인, 공연까지 다른 영역을 넘나들었다.
“내가 가질 수 있는 꿈이나 목표에 선을 긋고 싶지 않다. 경계를 뛰어넘어 할 수 있는 한 많은 것을 해보고 다양한 경험을 쌓고 싶다.”
―그래도 콘돔 사업을 사회공헌 사업 차원에서 뛰어든 건 엉뚱해 보인다.
“‘바른 생각’은 영리 사업이지만 비영리적 가치를 갖고 운영하는 브랜드다. 한국은 전 세계의 콘돔 30%를 생산하는 나라다. 하지만 국내에서 버는 수익은 1000억 원이 안 된다. 해외에 알릴 수 있는 자체 브랜드로 기업을 돕고 싶다. 사회적 측면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낙태율 1위, 콘돔 사용률 최하위라는 부끄러운 기록도 바꾸고 싶다. 올해 6월부터 편의점에서 팔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잘된다. 해외 수출도 곧 시작할 것 같다. 국내 수익금은 성교육 자료 개발 등 좋은 데 쓸 거다.”
앞으로도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되 좋은 시스템을 만들어 수익을 창출한 뒤, 수익이 선순환해서 지속가능한 사회적 비즈니스를 하는 게 그의 꿈이다. 새롭게 합류한 오리콤에서도 규모의 경쟁을 추구하기보다 사람들 기억에 오래 남을 수 있는 좋은 광고 캠페인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미래 광고인을 꿈꾸는 청년들에게 그는 “아이디어도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인성”이라고 강조한다. 광고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창의력 싸움은 머리가 아니라 엉덩이로 하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끝을 볼 때까지 매달리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라는 말이다. 미치게 놀았고, 미치게 공부했고, 미치게 일하면서, 그가 터득한 삶의 지혜다.
▼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과 아들 박서원의 ‘부자유친’ ▼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은 아들 서원 씨의 지목을 받고 올 8월 루게릭병 환자를 돕기 위한 아이스 버킷 챌린지에 동참했다.
서원 씨의 페이스북 영상을 통해 아들에게 얼음물 세례를 받는 아버지의 모습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들 부자는 지난해 동아일보가 선정한 ‘10년 뒤 한국을 빛낼 100인’에 ‘도전하는 경제인’과 ‘자유로운 창조인’ 분야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인터뷰에서 아버지 얘기가 나오자 서원 씨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아버지가 준 영향은 뭐 어마어마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제가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인성적 측면, 생각하는 가치관이라거나 라이프스타일 뭐 하나 영향 안 받은 게 없다.”
하기 싫은 것은 무조건 안 하겠다고 우기는 고집불통에, 성적은 바닥을 헤매는 아들의 잠재력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은 아버지의 믿음. 그것이 아들에게 가장 큰 자신감의 원천이 됐다. “집에서 공부 못했다고 혼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도 없다. 유일하게 혼난 것은 거짓말 했을 때다. 성적표를 숨겼다가 들켜 엄청 혼났다. ‘뭘 해도 좋으니 좋아하는 것을 찾아서 해라. 그래서 행복하면 된다’는 아버지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살았다.”
아버지는 아들에 대해 “지(제)가 알아서 큰 넘(놈)”이라고 말하고, 아들은 아버지를 “스스로 알아서 클 수 있도록 해주신 분”이라고 말한다. 학창 시절 열등생에서 세계 광고계를 사로잡은 광고인으로 서기까지 아들의 비밀병기는 바로 ‘부자유친(父子有親)’이었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