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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현 셰프의 비밀노트]수플레

입력 | 2014-11-05 03:00:00


사진 출처 데일리 텔레그래프


정동현 셰프

“정말 뷰우티푸울하다. 완벽해.”

또 시작이었다.

“너 페이스트리에 재능 있는 거 아니? 앞으로 디저트는 네가 다 만들어. 다음 주에 너랑 같은 조는 누구야? 디저트는 네가 하는 게 나을 거야.”

그날도 어김없이 영국 아줌마 에밀리의 오버가 작렬했다. 요리학교에서 수플레를 만든 날이었다. 요리학교는 10명이 한 반으로 매주 돌아가면서 두 명이 짝이 되었다. 수플레를 만든 그날 나는 에밀리와 한 조였다. 나보다 덩치가 훨씬 크고 수다스러운 아줌마였다.

에밀리는 그 타고난 낙천성을 감추는 법이 없었다. 나는 외국 사람이 다 그런 줄 알았는데, 그녀만 유독 심한 편이었다. 가령 생닭을 보고도 ‘뷰우티푸울’을 외치는 식이다. 그런 에밀리와 나는 손발이 척척 맞았다. 수플레는 그 정점이었다. 에밀리가 다른 요리를 하는 동안 내가 수플레를 만들었는데, 내가 봐도 기가 막힐 정도로 섹시하게 태가 났다. 수플레의 마법은 그런 호들갑을 부르는 ‘변신’에 있다. 뻥튀기처럼 ‘뻥’ 하고 부풀어 오른 수플레의 자태가 바로 수플레의 알파요 오메가다. 수플레라는 이름의 어원부터가 ‘부풀어 오르다(puff up)’는 뜻의 프랑스어 수플레르(souffler)의 과거분사형이다.

만드는 과정은 약간 까다롭다. 우선 설탕, 우유, 밀가루, 달걀노른자로 커스터드를 만든다. 수플레 베이스(souffle base)다. 여기에 라즈베리나 초콜릿을 녹여 맛을 넣는다. 베이스와 맛이 결정되면 건물을 올리듯 골조가 필요하다. 수플레의 기둥이요 서까래는 달걀흰자로 만든 머랭이다. 머랭이 제대로 됐는지 확인하려면 간단히 그릇을 뒤집었을 때 그 하얀 거품이 떨어지지 않으면 된다. 베이스에 머랭을 조심조심 섞은 후 믹스를 용기에 평평하게 담고는 200도로 뜨겁게 달군 오븐에 10분 정도 굽는다. 이 과정을 제대로 따라했다면 고개를 배꼼 내민 수플레가 탄생할 것이다.

수플레가 나오면 주저하지 마라. 가장 아름다울 때 먹어야 한다. 시적인 영상미와 선문답이 난무하던 왕자웨이 감독 영화 ‘동사서독(Ashes of Time·1994년)’에서 하얀 얼굴에 핏빛 입술을 한 장만위는 이렇게 말했다.

“난 (인생에서) 이겼다고 생각해왔어요. 그러던 어느 날 거울을 보고 졌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에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없었으니까요.”

수플레도 마찬가지다. 아름다운 자태일 때 입에 넣어야 한다. 보기 좋을 뿐만 아니라 그때 먹어야 제일 맛있다.

서양에서는 그런 수플레의 맛을 표현할 때 좀 유난스럽다. 성스럽고 천국 같다고 한다. 하긴 잘 만든 수플레는 그런 찬사가 아깝지 않다. 그러나 내가 만든 수플레가 찬사를 받자 민망하기만 했다. 에밀리의 주책없는 호들갑에 다른 친구들도 몰려와 내 수플레를 맛보더니 물었다.

“비결이 뭐야?”

그들이 한국말을 알아들었다면 “살다 보면 운 좋은 날이 있고, 그렇지 않은 날도 있지. 수플레도 그래. 오늘은 운이 좋았던 거지. 인생은 수플레 같은 거잖아”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영어로 “사랑을 담았지”라고 간결하게 답했다. 뜨악한 표정과 어이없어 하는 웃음소리가 뒤섞였다.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그 길에 들어섰지만 여전히 삶은 힘든 것이다. 그럼에도 변명하거나 되돌아갈 수 없는 허망함. 잘 부푼 수플레처럼 아름다운 날도 있지만 그보다 더 자주 찾아오는, 이유 없이 주저앉아 버린 수플레처럼 엉망인 날들. 그렇게 무엇이든 원망하고 싶을 때 나는 그날 만들었던 수플레를 생각한다. 그러면 한결 마음이 나아진다.

진정 수플레를 아름답게 하는 것은 그것의 연약함이다. 달걀흰자 속 공기방울같이 연약하고 깨지기 쉬운 것들을 품었기 때문에 비로소 가볍게 높이 부풀어 오를 수 있음을 생각한다. 연약한 것들의 가벼움에 경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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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필자(32)는 영국 고든램지 요리학교 ‘탕테 마리’에서 유학하고 호주 멜버른 크라운 호텔 등에서 요리사로 일했다.

정동현 셰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