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테크’ 금융혁명이 온다]<3> ‘한국형 핀테크’ 뒤늦게 잰걸음
은행 직원이 고객의 자택 거실에서 정기예금상품 상담을 하다 태블릿PC의 카메라 애플리케이션(앱)을 켠다. 고객 얼굴사진을 찍고 태블릿PC에 설치된 은행 직원용 스마트금융 프로그램에 아이디(ID)를 입력하자 고객의 얼굴사진과 개인정보가 은행 중앙전산망으로 전송된다. 1분 정도 지나 은행에서 메시지가 하나 도착한다. ‘신원 확인이 완료됐습니다.’
시중은행들이 내년 상반기에 선보이려고 준비 중인 ‘태블릿 브랜치’(태블릿PC를 이용한 이동 점포)는 이런 방식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은행을 방문하지 않고 집에서 계좌를 만드는 게 더이상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 지점 없는 금융사 점차 현실화
은행 창구에 길게 늘어서던 줄이 사라지면서 지점을 중심으로 이뤄지던 은행의 영업환경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 2006년 말 22.1%이던 은행 입출금 대면거래(창구 직원을 통해 하는 거래) 비중은 올해 6월 말 11.2%까지 떨어졌다. 같은 기간 인터넷 거래 비중은 21.8%에서 34.5%로 늘었다. 은행 지점 수는 2012년 말 6757곳에서 올해 2분기 6452곳으로 300곳 이상 줄었다.
이에 따라 국내 은행들은 핀테크를 활용한 ‘탈(脫)점포화’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은행권은 다음카카오와 손잡고 카카오톡을 통해 소액결제와 송금이 가능한 ‘뱅크월렛 카카오’를 이달 11일 선보일 예정이다. 스마트폰으로 복잡한 절차 없이 간편하게 송금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종이통장을 모바일통장으로 바꾸는 작업도 진행 중이다. 우리은행이 8월부터 ‘모바일 디지털 통장’을 도입한 데 이어 기업은행도 내년 상반기까지 모든 종이통장을 모바일통장으로 대체할 예정이다. 신한은행도 모바일통장과 ‘전자지갑’을 결합한 상품을 준비하고 있다.
인터넷 기반의 홈트레이딩시스템(HTS), 스마트폰의 모바일트레이딩시스템(MTS)을 넘어 최근에는 카카오톡 플랫폼을 활용한 주식매매결제 서비스(STS)까지 등장했다. 증권사 관계자는 “그동안 면대면으로 이뤄지던 자산관리도 온라인으로 옮겨가는 등 ‘탈점포’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 빅데이터 활용, 주가 예측·사기 예방도
빅데이터를 금융에 접목하려는 시도도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다. 지난해 말 업계 최초로 빅데이터센터를 설립한 신한카드는 5월 2200만 명의 고객으로부터 수집한 빅데이터를 바탕으로 맞춤형 혜택을 제공하는 카드상품 ‘코드나인 시리즈’를 내놨다. 기존처럼 세대별, 계층별로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성향이 비슷한 고객층을 9가지로 분류해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한다.
금융투자업계에서는 빅데이터를 이용해 주가예측 시스템까지 만들고 있다. 코스콤은 인터넷상에서 오가는 ‘입소문’을 활용해 사회 분위기가 주가에 미치는 영향을 예측할 수 있는 모델을 개발해 상용화를 추진하고 있다. 코스콤 관계자는 “각종 주식시장 관련 데이터들을 바탕으로 시작 전 주가를 예측했더니 평균 적중률이 60%를 넘었다”면서 “트위터에서 자주 검색되는 키워드를 지수화한 ‘K-인덱스 도입’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 아직은 초보단계…갈 길 먼 금융권
금융회사들이 뒤늦게 핀테크를 활용한 스마트금융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다. 핀테크와 스마트금융에 대한 금융회사들의 이해가 부족하고, 신기술 도입도 규제와 예산 등의 문제로 지연되는 경우가 많다.
A은행의 스마트금융 관련 부서는 조직을 개편하고 외부 전문 인력까지 뽑았지만 사업이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은행으로서는 금융 보안사고가 발생했을 때 금융회사가 전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부담스럽다. 인터넷, 모바일 거래가 늘어봐야 소액거래가 대부분이라 수익성이 낮은 것도 문제다.
A은행의 스마트금융 관계자는 “핀테크로 인한 시장변화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임원들은 ‘다른 은행이 하면 그때 가서 하자’는 식이어서 속도가 늦어지고 있다”라고 털어놨다.
금융사기에 대응하기 위한 이상거래방지 시스템 구축도 지연되고 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연말까지 구축하라고 독려하고 있지만 아직 지지부진한 상태”라고 말했다. 빅데이터 활용도 데이터를 수집하는 초보적 수준에 그치고 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중요성은 공감하지만 시스템 구축비용이 많이 들고 당장 수익이 나는 것도 아니어서 사업을 추진하다가 중단한 증권사가 많다”라고 말했다.
▼ “IT와 금융의 융합… 현장목소리 듣겠다” ▼
금융당국, 10일 민관협의체 발족
글로벌 핀테크 혁명의 바람이 한국 금융계에도 불어닥치자 금융당국이 본격적인 대책 마련에 나섰다.
5일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금융당국은 10일 정부와 금융계, 정보기술(IT)업계를 한데 모은 민관협의체를 발족하고 의견 교환과 법·제도 개선을 추진하기로 했다. 이 협의체에는 정부 당국과 시중은행 카드사 증권사 등 금융회사, IT기업 전자결제대행업체(PG사) 보안업체 관계자, 유관기관 및 학자 연구원 등 약 20명이 참여하기로 했다.
이들은 격주 또는 월 1회 정기적으로 모여 핀테크 산업 발전을 위한 정보를 공유하고 정책지원 방안 마련을 위한 실무적인 논의를 진행할 예정이다. 전요섭 금융위 전자금융과장은 “일단 각 분야의 사람을 모두 모아 다양한 의견을 들어보려 한다”며 “IT와 금융 간 융합과 관련해 업계에서 하고 싶은 게 뭔지, 정부가 지원해줄 게 뭔지,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방향성도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금융위는 IT와 금융의 융합에 대한 해외 사례 및 국내 핀테크 산업의 발전 방안에 대한 외부 연구용역도 발주했다.
선진국에선 이미 일반화된 인터넷전문은행의 도입 방안도 조만간 검토 대상에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금융계에서는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국내에 인터넷전문은행을 안착시킬 수 있는 몇 가지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 실제 금융위는 올해 7월 금융규제 완화 방안을 마련하면서 인터넷전문은행을 시중은행의 자회사 형태로 설립하도록 하는 방안을 연구하기도 했다. IT·제조기업이 은행업에 진출하게 하려면 현재의 ‘금산분리 규제’를 건드려야 하지만 기존 금융회사가 소유하게 하면 이런 법적인 제약을 피할 수 있어서다.
소매금융 형태로 은행업 인가를 내주는 방안도 고려 대상이다. 산업자본이 인터넷전문은행을 운영한다 해도 법으로 기업금융을 할 수 없도록 금지하면 고객 돈을 모아 계열사에 자금 지원을 해주는 은행의 ‘사(私)금고화’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전문은행에 한해 산업자본이 소유할 수 있는 지분한도를 지방은행처럼 15% 수준으로 완화하는 방안도 검토해볼 만한 방안이다.
특별취재팀
팀장=신치영 경제부 차장 higgledy@donga.com
팀원=유재동 정임수 김재영 신민기 송충현 박민우 기자(경제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