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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 기자의 무비홀릭]예술과 변태 사이

입력 | 2014-11-06 03:00:00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영화 ‘보이후드’의 한 장면. 동아일보DB

에로비디오 감독의 주류 상업영화 도전기를 담은 영화 ‘레드카펫’(지난달 23일 개봉)을 보면서 나는 에로영화계야말로 창의적 인재들로 득실득실한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영화 속엔 유명 한국 영화의 제목을 패러디한 ‘공공의 젖’(공공의 적) ‘해준대’(해운대) ‘싸보이지만 괜찮아’(싸이보그지만 괜찮아) 같은 에로비디오 제목들이 등장하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저질스럽고 창의적인 제목의 에로영화들은 이번 레드카펫으로 주류 상업영화계에 첫발을 들여놓은 박범수 감독이 에로비디오 감독 시절 실제로 찍은 작품이란 사실이다. 허술해 보이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진정성이 느껴지는 이 영화엔 ‘발기해서 생긴 일’ ‘목표는 형부다’ ‘굵은 악마’ ‘반지하의 제왕’ ‘헨젤과 그랬대’ 같은 에로비디오계의 레전드급 제목들도 등장하는데, 이런 제목을 만들어내는 에로비디오 예술가들의 놀라운 상상력과 창의력에 경의를 표하고 싶을 지경이다.

에로비디오엔 예술가 정신이나 영혼이 결핍되어 있으리란 생각은 편견 중 편견이다. 착탈식 성기를 가진 남자의 애환을 그린 ‘만덕이의 보물상자’를 연출한 공자관 감독은 지금으로부터 10년여 전 ‘촛불시위’를 소재로 한 신개념 에로영화 ‘태극기를 꽂으며’로 사회적 물의를 빚기도 했는데, 이는 독립운동가의 자손인 ‘태극기’란 이름의 호스트바 종업원이 어느 날 여중생 사망 추모 촛불시위를 우연히 보고는 조국의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 태극기가 그려진 팬티를 착용한 채 미국 고위급 인사들의 아내를 차례차례 자신의 성 노예로 전락시켜 버린다는 내용이다. 영상물등급위원회의 등급분류에서도 수차례 보류된 이 공격적인 문제작을 통해 공 감독은 에로비디오를 통해서도 진보적 이데올로기를 구현할 수 있음을 증명한 바 있는 것이다.

영화감독들의 예술가정신은 때론 심장이 멎을 만큼 도착적인 모습으로 드러난다. 올해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노작 ‘보이후드’(지난달 23일 개봉)를 추천하는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다. 여섯 살짜리 꼬마 ‘메이슨’이 부모의 이혼과 이후 여럿의 새아빠를 경험하면서 결국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8세 대학생으로 홀로 서기까지의 12년을 오롯이 담아낸 이 지루한 듯 지루하지 않은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꼬마에서 청년으로 성장해가는 영화 속 주인공의 얼굴이 진짜로 딱 한 명의 얼굴인 듯 미세하고 절묘하게 바뀌어가는 모습에 감탄하게 된다.

어찌하여 이렇듯 얼굴이 흡사한 소년 배우들을 나이대별로 캐스팅할 수 있었을까? 놀라지 마시라. 이 영화는 말 그대로 ‘진짜’ 성장영화다. 실제로 여섯 살짜리 꼬마 한 명을 섭외해서 그 꼬마가 18세가 될 때까지 무려 12년 동안 매년 15분 분량씩 찍어 모았으니 말이다. 아! 스토커들도 혀를 내두를 만큼 도착적인 감독의 리얼리티 정신을 찬양하라. 링클레이터 감독은 집에서 곰인형의 눈알을 붙이는 아르바이트를 해도 하룻밤 6만 개는 너끈히 붙여내면서 동틀 무렵에 희열을 느낄 인간이다.

리얼리티에 대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도착도 정신질환 수준이다. 미래 지향적인 메시지를 가장 아날로그적인(더 정확하게는 ‘원시적인’) 방법으로 구현해내는 놀런은 컴퓨터그래픽(CG)을 거부하고 ‘진짜’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유명한데, 멸망을 앞둔 인류의 새로운 희망을 찾아 우주로 떠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인터스텔라’(6일 개봉)에 등장하는 30만 평 규모의 옥수수밭도 “CG를 쓰지 않겠다”는 그의 고집에 따라 실제로 6개월간 옥수수를 키워 일궈낸 결과물이다. 영화 속 미친 듯이 불어 닥치는 모래폭풍도 CG가 아니라 골판지를 일일이 갈아서 초대형 선풍기로 불어 날린 것이고 말이다.

이쯤 되면 알 것 같다. 놀런 감독의 천재성은 하늘이 어느 날 ‘옜다 먹어라’ 하고 내려준 선물이 아니라, 지독한 집념과 자기암시가 예술가정신이라는 뼈를 깎는 고통을 경유하며 이뤄진 퇴적물이란 사실을. 디자이너 고(故) 앙드레 김이 흰색 옷, 흰색 자동차, 흰색 애완견에 집착하고 심지어 탄산음료도 투명한 사이다만 마셨던 것도,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 여성이 성교 중 “나 깨끗하고 싶어. (나를) 깨끗하게 해줘”를 연발하는 것도 모두 ‘순수’에 대한 예술가적 집착의 일단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하긴 글을 쓰는 나도 예술가까진 아니지만 집착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수준이다. 이 글을 쓰면서도 ‘에로영화들이’라고 써야 할지 ‘에로영화들은’이라고 써야 할지를 두고 조사를 ‘이’로 썼다가 다시 ‘은’으로 바꾸기를 한 시간 가까이 거듭했으니 말이다. 영화 속 여배우의 발뒤꿈치를 두 시간 동안 떠올리면서 ‘얼마나 만질만질할까’를 상상하거나, 하이힐을 보면서 ‘뒷굽이 내 정수리에 꽂히면 아플까 짜릿할까’를 궁금해하는 나도 이젠 변태가 아니라 어엿한 예술가적 도착의 주인공이라고 자위해도 될까. 똑같은 칼이라도 의사가 들면 좋고 강도가 들면 나쁘듯, 똑같은 집착이라도 어떨 땐 변태로 취급되고 또 어떨 땐 예술가로 추앙받는구나!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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