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憧憬 동경 이종찬 회고록]〈12〉 아이젠버그의 공
1980년 4월 전두환 중앙정보부장 서리(왼쪽)로부터 금탑산업훈장을 받은 아이젠버그(왼쪽에서 두 번째). 오스트리아 국적의 이스라엘 기업인인 아이젠버그는 한국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인 고리 원전 건설에 캐나다의 캔두(CANDU)형 원자로 도입을 주선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종찬 씨 제공
그러던 차에 하필이면 1979년 10월 26일 아침, 태국주재 대사관에서 전문이 날아들었다. 김인권 대사가 ESCAP총회 도중 구엔 코 탁 베트남 외교담당 국무상을 잠깐 만났는데, 그가 억류공관원 송환에 대해 “아이젠버그를 통하여 연락을 해주겠다. 시간문제이니 최대한 보안에 유의하여 달라고 했다”는 짧은 메시지였다.
나는 외무부에 전문배포를 중지시킨 뒤 즉각 윤일균 차장에게 보고했다. 윤 차장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밀봉된 봉투에 붉은 도장을 다섯 개나 찍어 김 부장에게 가지고 갔다.
12·12 사건 이후 사태가 다소 안정을 찾아가던 12월 말 어느 날, 나는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허화평 대령에게 사령관 긴급 면담을 요청했다.
“꼭 사령관님을 만나야 할 사안이 무엇입니까?” 그가 물었다.
“내가 사전에 먼저 말할 수는 없고, 사령관께 보고한 후 알려드리지요.”
그는 평소에도 판단력이 빠르고 과단성이 있는 후배였다. 즉시 면담이 이루어졌다.
전 장군은 후배에게는 항상 친화력이 있는 분이었다.
“시간을 허락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은 김재규 부장의 지시로 베트남에 억류 중인 공관원 구출작전을 제가 맡아서 진행해 왔습니다. 그동안 일이 잘 풀려나가는 시점에 박 대통령이 서거하여 지금 억류 중인 분들의 신상에 해로운 결과가 되지 않을까 걱정돼 왔습니다.”
나는 그간의 과정을 상세히 보고했다. 전 장군은 월남파견 연대장도 지냈기 때문에 이대용 공사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 내가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나?”
“그건 안 돼! 누구도 김재규를 만날 수 없어.”
“그러면 그때 보고서라도 찾아서 내용을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보고서를 한 장도 남기지 말라 하여 모두 김 부장에게 드렸습니다.”
“알겠네.”
마지막으로 나는 말했다. “이 사업은 이대용 공사를 비롯한 대한민국 외교관의 생사가 걸린 문제입니다. 현재 많은 사업이 중단된 상태지만 이 사업은 계속 진행하여 끝을 내야겠습니다.”
답은 예상외로 빨리 왔다. 파일은 남산의 부장 침실 옆 서류함에 있고 자세한 사항은 비서실장 김갑수 장군이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 김 장군은 연금 상태였다. 나는 보안사 수사처장 이학봉 대령에게 면접허가를 얻어 김 장군을 만난 뒤 남산사무실로 가서 서류파일 일체를 찾아왔다. 파일에는 나의 보고서도 있었고, 김 부장과 아이젠버그 간에 오간 편지도 있었다. 지금 기억나는 것은 아이젠버그가 ‘상당히 자신 있게’ 공관원을 자기 비행기로 직접 데리고 나오겠다고 약속하는 듯한 내용이었다.
나는 즉각 전 장군에게 보고하고, 이 공사 일행의 사기를 고려하여 우선 급한 대로 정부의 확고한 뜻을 전하는 메시지가 필요하다고 건의했다.
그런데 외교관 출신인 최규하 대통령은 외무부를 통하여 이 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그는 박동진 외무장관에게 스웨덴을 통해 외교적 교섭을 진행하도록 지시했다.
베트남정부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현명했다. 그들은 아이젠버그에게는 실질적인 성과를 약속하면서, 외부적으로는 중립국 스웨덴이 생색을 내도록 조치했다.
1980년 4월 나는 전 부장에게 월남억류 공관원을 구출해 내는데 가장 공로가 큰 사람은 뭐니 뭐니 해도 아이젠버그였음을 상기시키고 그를 초청해 공로훈장을 수여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또 아이젠버그는 국제적인 기업인이니, 앞으로 우리나라 경제발전에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물론 아이젠버그를 조심할 필요는 있었다. 그가 60년대 외자도입을 알선해서 큰 재미를 보았고, 공화당(창구는 김성곤)과 거래하면서 정치자금을 헌납한 것 때문에 미 의회 청문회에서도 거명된 적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최 대통령은 그에게 직접 훈장을 수여하는 것을 꺼렸다. 전 부장이 최 대통령을 대리해 그에게 훈장을 줬다. 그러나 아이젠버그는 전 장군의 훈장 수여를 더 반겼다. 이미 그는 한국정세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 있는 듯했다. 전 장군도 그를 환대했다.
▼ “임자가 떠나면 작전계획은 누가 짜나” ▼
이대용을 아낀 박정희
육사 7기생인 이대용은 1959년 박정희 소장이 6관구 사령관으로 있을 때 작전참모였다. 복잡하고 어려운 ‘서울철수 작전계획’은 그때 수립됐다. 이대용 전 주월(駐越) 공사는 회고록 ‘김정일과의 악연 1809일’에서 “대령으로 영전할 기회가 있었지만, 박정희 사령관이 ‘임자는 안돼. 임자가 떠나면 서울철수 작전계획은 누가 만드나!’라며 붙잡았다”고 썼다.
그로부터 2년 반 후, 이대용이 전방에서 연대장을 하고 있을 때 연락이 왔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공보실장으로 부른다는 전갈이었다. 육사 1기 후배인 김종필, 강신탁, 김형욱, 오치성 대령이 강력히 밀었다는 소리가 들렸다.
이대용은 거절했다. 박정희를 존경했지만, 이대용은 ‘군의 정치개입’은 지지하지 않았다. 그는 ‘참군인’ 이종찬의 길을 흠모했다. 10일 후, 그 자리는 이후락에게 돌아간다.
5·16 군사정변과 함께 군은 급격하게 ‘영남 군맥’으로 재편돼갔다. 군의 정치개입에 반대하고, 황해도 금천 출신인 이대용이 ‘비빌 언덕’은 거의 없었다. 주월 무관 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뒤에도 3번의 준장 진급 심사가 있었지만 번번이 탈락했다. 전역을 결심하고 있을 무렵, 느닷없이 장군 진급 통보가 왔다. 진급심사위원 중 한 명인 장우주 소장이 “연대장 재직시 공금은 단돈 1원 한 푼 손대지 않고, 장병들을 정량(定量)대로 먹이고 훈련시켜 부하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다”며 진급을 극구 주장했다는 후문이었다.
그러나 심사위원장이 미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 진급 정원은 28명. 결국 이대용까지 29명을 선발해 대통령의 최종 낙점을 받자는 절충안이 나왔다. 그런데 29명 중 박 대통령이 유일하게 언급한 사람은 이대용이었다. “음∼. 이대용. 성실하고 우수하지. 장군이 돼야지.”
하지만 진급이 됐을 뿐이었다. 무보직으로 전전하다 겨우 6관구 부사령관직으로 발령이 났다. 한물간 장군이 예편을 앞두고 가는 자리였다.
그러던 어느 날, ‘땜빵’으로 6관구 사령관의 골프모임에 차출됐는데 뒤가 바로 박 대통령 일행이었다.
“이 장군, 지금 어디 있나?” 박 대통령이 거수경례를 하는 이대용에게 물었다.
“네, 제6관구 작전부사령관을 하고 있습니다.”
박 대통령은 의아하다는 듯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그리고 다음 홀로 가서 티샷을 한 뒤 다시 돌아왔다.
“이 장군, 왜 보직을 받지 않았나?” 이대용은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질문의 참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왜 그런 ‘개도 물어가지 않는’ 보직을 받았는지 사연을 묻고 있는 것이었다. 10초, 20초 무거운 침묵만 흘렀다.
박 대통령은 말없이 이대용만 바라봤다. 그러고는 또 무슨 말을 하려는 듯 망설이다가 “이 장군, 나 먼저 가”라는 말을 남기고 발걸음을 돌렸다.
며칠 후, 국방장관의 구두메시지가 전달됐다. “대통령 각하의 특별지시에 의거, 이대용 장군을 소장으로 진급시켜 예편시킨 후, 주월 한국대사관 부대사로 임명함!”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