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성 전문기자
저 핏빛 노을 좀 봐! ‘해질 녘이면 누구나 노을 한 폭씩 머리에 이고,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서성거린다.’(조태일 시인) 가슴이 헛헛하다. 와락 불이 붙는다. 김치찌개가 자글자글 끓는다. 뽀글뽀글 어머니 냄새가 자진모리장단으로 익는다. “아들아, 밥은 잘 먹고 댕기는 겨∼?” 저승의 늙은 어머니가 느럭느럭 한 말씀 하신다. 어휴, 아직도 자식 걱정이신가.
김치찌개는 대한민국 어머니 수만큼 있다. 김치가 열이면 열, 집집마다 다르듯이, 김치찌개도 방방곡곡 들꽃처럼 만발한다. 어머니 손맛에 따라 그 맛이 오묘하게 춤을 춘다. 칼칼하고 구뜰한 맛, 시큼하면서도 담백한 맛, 매옴 들큼하게 당기는 맛, 평생 날마다 먹어도 질리지 않는 시원한 감칠맛…. 가히 국민찌개요, 국민요리다.
김치찌개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김치다. 하지만 김치는 잘난 체하지 않는다. 낮에 나온 반달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어우러진다. 모든 것을 무한대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아무리 독특한 재료라도 그저 김치와 한바탕 보글보글 끓기만 하면 스르르 풀어진다. 김치에 중화돼 제 맛을 버리고, 기꺼이 ‘김치보조 맛’으로 다시 태어난다.
김치찌개엔 묵은지가 기본이다. 김치가 1년쯤 문드러져 곰삭아야 묵은지라 할 수 있다. 기껏 1, 2주일 숙성된 것은 익은지일 뿐이다. 익은지가 오래되면 시어터진다. 신 김치엔 생김치를 약간 섞으면 된다. 생김치는 오래 끓이면 잎이 오그라지고 흐물흐물해진다. 익은지나 묵은지는 웬만큼 끓여도 사각거리는 맛이 남아 있다.
김치찌개는 ‘엄청 센 불에 눈 깜빡할 새 끓여내야’ 맛있다. 불땀소리가 한여름 소나기 몰아치듯 ‘우르르’ 나야 한다. 약한 불로 뭉근하게 오래 끓이다 보면 칼칼한 맛이 사라진다. 양은냄비에 신 김치를 넣어 끓이면 김치의 산(酸) 성분 때문에 냄비의 알루미늄 성분이 녹아든다. 뚝배기나 스테인리스 냄비가 제격이다.
요즘 일반 식당의 김치찌개는 ‘공장 묵은지’를 쓰는 게 보통이다. 국물도 사골육수나 멸치육수를 쓰지 않고 맹물이나 고작 뜨물을 쓴다. 김치공장에선 오랜 시간 발효시켜 묵은지를 만들지 않는다. 채산성이 맞지 않아 ‘강제 숙성’시킬 수밖에 없다.
늙은 은행나무가 으스스 떤다. 우듬지의 모과 하나가 간당간당하다. 11월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행복한 달. 새벽 찬물에 머리를 헹구듯 정갈한 달. 메스껍고 느끼한 것들이 말갛게 가라앉는 달.
시도 때도 없이 사는 게 비릿하고 느글느글하다. 문득 칼칼하고 시원한 김치찌개가 먹고 싶다. 도대체 어머니는 어떻게 알고 그때그때 내가 원하는 김치찌개 맛을 콕콕 집어 끓여내셨을까. 살짝 새척지근하며 시큼한 맛, 매옴 들척지근 달콤새콤한 맛 그리고 땀 뻘뻘 알싸하고 맵싸한 맛, 엇구수하며 쌈박하고 개운한 맛….
‘허기 속에 기다리던 저녁밥상/한가운데 구수한 김이 산같이/뭉게구름으로 피어오르던 그 김치찌개//맛이 다 간 신 김치가 싹둑싹둑/산해진미로 변신했던 요술찌개//이제도 아른거리는 정겨운 어머님 냄새/오늘 식탁 위에 그윽하게 번져오를/엄니김치찌개’.(장태평 ‘김치찌개’에서)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