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로 지적(知的)이지 않은 사람들도 “저녁이면 책을 읽는다”라고 말할 정도로 책을 많이 읽는 프랑스 국민이니 이해가 가기도 한다. 하지만 한정된 하루 낮 12시간 동안 막중한 국정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이 업무 이외에 다른 책을 본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정치인이 반드시 온갖 작가의 소설책을 다 읽어야 한다는 법도 없다. 그러고 보면 프랑스 국민은 너무 문학적이고, 재빠르게 변화하는 이 디지털 사회에서 조금은 시대착오적이다.
‘텍스트의 즐거움’이라는 프랑스 기호학자의 책도 있듯이 동서고금의 많은 문필가들이 책 읽는 즐거움을 얘기하고 있지만, 사실 어른이 된 후 자기가 읽고 싶은 책을 마음 놓고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식에도 유효 기간이 있어서 물리학은 13년, 경제학은 9년, 심리학은 7년이 지나면 쓸모없는 지식이 되어 버린다는 이론도 있지만(‘지식의 반감기(半減期)’) 그건 일찍이 내가 책꽂이 앞에서 절감하던 생각이다. 루카치, 마르쿠제, 시몬 베유… 줄 쳐 가며 무던히도 열심히 읽던 그 책들은 지난 십수 년간 단 한 번도 다시 들쳐본 기억 없이 먼지만 쌓이고 있다. 반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책은 수없이 다시 들치게 돼 그들의 유효 기간이 2000년이 넘는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푸코, 데리다 등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에 대한 대중의 호감도도 시간에 따라 편차가 느껴지지만, 역시 칸트와 헤겔은 끊임없이 다시 찾을 수밖에 없는, 마르지 않는 샘이다. 문학으로는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이 200년 가까운 세월을 견디고 있다. 누렇게 변색되어 바스러져 내리는 그의 책을, 시선의 문제 혹은 숭고미학의 주제를 위해 자주 꺼내 다시 읽고 있으니 말이다.
인간 세상에 대한 빛나는 통찰이 나의 책읽기가 주는 커다란 기쁨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가끔 ‘사랑의 선물’ ‘칠칠단의 비밀’ ‘십오소년 표류기’ 등을 읽던 그 옛날의 어린 시절이 눈물나게 그리워진다.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