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찬 前 총리가 말하는 한국 경제, 한국 정치
정운찬(68) 전 국무총리는 정부를 떠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정치권과 언론의 안테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서울대 총장, 국무총리를 지내 행정 경험이 풍부한 데다, 한국을 대표하는 경제학자이면서 동반성장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우리 사회의 가장 큰 고민인 저성장과 양극화 문제를 해결할 적임자로 꼽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 양쪽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을 만큼 보수와 진보 이념으로부터 자유롭다. 언제든 차기 대선 판도를 뒤흔들 파괴력을 가진 잠룡(潛龍)의 한 사람이다.
서울대 인근에 있는 (사)동반성장연구소에서 그를 만났다. 2012년 3월 동반성장위원장을 사퇴한 그는 같은 해 6월 (사)동반성장연구소를 열었다. 동반성장을 평생 화두로 삼은 셈이다. 그는 따뜻한 미소로 기자를 맞았다.
“‘백수 과로사’ 실감합니다”
▼ 어떻게 지냅니까.
“지난해부터 서울대에서 다시 강의를 맡았습니다. 1학기에는 산업경제세미나, 2학기엔 금융경제세미나를 합니다. 이론 강의뿐 아니라 경영인, 금융전문가 등 현장에 있는 분들을 불러 이야기를 듣는 시간도 갖습니다.”
그의 강의는 인터넷 수강신청 접수 시작 10초 만에 마감되는 것으로 유명하다. 여전히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는 모양이다.
▼ 강의는 앞으로도 계속할 계획인가요.
▼ 강의 외에 다른 일은.
“오전 10시까지 이곳에 출근해 오후 6시에 퇴근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동반성장을 주제로 외부 강연을 나가고요. 사람을 좋아해서 많이 만나고, 한 달에 한번 동반성장을 주제로 포럼을 운영하고, 외부에서 동반성장에 대한 연구 의뢰가 들어오면 팀을 꾸려 연구도 하고요. 백수가 바빠서 과로사 한다는 말을 실감합니다.(웃음) ‘동반성장 전도사’를 자임했으니 당분간은 이 일에 주력할 생각입니다.”
화제가 자연스럽게 ‘동반성장’으로 이어졌다.
▼ 지난 대선 때만 해도 ‘경제민주화’ ‘동반성장’이 화두였는데, 지금은 쏙 들어간 것 같습니다.
한국 경제를 흔히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가 주도하는 ‘전차경제’라 부른다. 삼성, 현대, LG, SK 등 4대 재벌이 올리는 연 매출액이 국내총생산(GDP)의 60%에 육박한다. 그래서 경제민주화, 동반성장을 이유로 대기업을 너무 옭죄면 안 그래도 어려운 경제가 더 나빠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정 전 총리의 의견은 달랐다.
“우리 경제가 몇몇 대기업에 좌지우지 되는 게 비정상이죠. 정상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다고 삼성, 현대가 잘못돼도 좋다는 건 절대 아닙니다. 지난 60년 동안 선(先)성장 후(後)분배 논리로 대기업 중심 성장을 하면서 양극화가 심해졌으니 이걸 바로잡자는 거예요.”
▼ 다른 나라 사정은 어떤가요.
“우리처럼 대기업 중심으로 발전한 나라는 거의 없어요. 일본도 대기업 중심으로 발전했지만 중소기업도 튼튼합니다. 대만은 아예 중소기업 중심이어서 한두 업종이 휘청해도 큰 문제가 없는데, 우리는 재벌 한 곳에 문제가 생기면 나라 전체가 큰 타격을 받습니다. 취약한 경제 구조죠.”
▼ 대기업 중심 성장이 양극화를 심화시켰다고 보는 이유가 뭔가요.
“과거 대기업 중심 성장정책 논리가 ‘큰 기업이 성장하면 작은 기업도 그 혜택을 받아 성장한다’였어요. 일종의 낙수효과를 기대한 거죠. 그게 가능하려면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공정한 거래를 해야 합니다. 불공정거래에서는 낙수효과가 생기지 않아요. 또한 대기업이 국내에서 사업을 하지 않고 해외에 공장을 지으면 국내 경제엔 낙수효과가 생길 수 없어요.”
▼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추진하는 경제정책은 어떻게 보는지요.
“가계에 직접 소득이 가도록 해 ‘소득 주도 성장’을 유도하겠다는 것인데, 이를 분수효과라고 합니다. 가계소득이 늘어나면 소비가 늘고, 소비가 늘면 생산이 늘어난다는 것이죠. 선진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이 정책을 폈습니다. 우리나라가 이제라도 이 정책을 펴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기본 방향은 잘 잡았는데,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정운찬 전 총리. 사진=김형우 기자 free217@donga.com
“盧 정부 때 재벌 힘 키워”
▼ 어떤 점이….
“대기업에 사내유보금이 너무 많으니까 배당을 많이 하도록 유도하겠다고 하는데, 대기업 주식은 대부분 외국인, 기관투자자들이 가졌어요. 개인투자자 역시 주식 배당으로 먹고살 정도면 이미 쓸 거 다 쓰고 사는 사람입니다. 배당을 늘린다고 국민 소비가 더 늘진 않아요. 또한 임금을 올리도록 유도한다고 하는데, 기업으로선 임금을 한번 올리면 내리기가 힘드니까 쉽지 않죠. 설령 임금이 올라 소득이 늘었다 해도 가계부채가 1000조 원이 훨씬 넘어요. 돈이 생겨도 소비로 이어지기 힘든 구조죠.”
▼ 해결방법이 있다면.
“소비보다 투자를 촉진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경제가 발전하려면 생산능력이 확충되고 생산물에 대한 수요가 늘어야 합니다. 1970년대 초반부터 1997년까지 가계소득과 기업소득 모두 연 평균 8%씩 늘었는데, 2005년부터 지금까지를 보면 가계소득은 연 1~2% 증가한 반면 기업소득은 연 19%씩 늘어났어요. 그런데 투자가 거의 안 됐어요. 그만큼 기업유보금이 쌓여 있는 상태죠. 그 규모가 250조 원에 달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 박근혜 대통령도 그렇고 전임 대통령들도 기업의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규제개혁을 실시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규제를 없애면 기업이 투자를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이윤이 남는다면 규제에 관계없이 투자하는 게 기업의 속성입니다. 투자할 곳도 없는데 투자를 하라니까 규제 핑계를 대는 거죠. 역대 대통령이 다 그렇게 속았어요.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벌개혁을 제대로 한 최초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했지만 재벌의 힘이 가장 커진 때가 그때입니다. 모 재벌기업 산하 경제연구소의 연구 결과를 재벌정책으로 삼았다는 얘기까지 나오지 않습니까?”
▼ 왜 그랬던 건가요.
“제가 농담으로, 경제정책을 좌우하는 경제 관료들이 유학 가서 공부를 빨리 끝내려다보니 책을 끝까지 안 읽고 앞 부분만 읽어서 그렇다고 말합니다. 경제학 책 대부분이 앞에는 효율만 이야기하고 문제점은 뒤에서 다루거든요.(웃음)”
▼ 기업들이 투자를 하지 않는 이유가 뭔가요.
“대기업은 천문학적인 여유자금을 가졌지만 투자할 곳을 찾지 못하고 있고, 중소기업은 투자할 곳은 많은데 돈이 없어 못하는 실정입니다. 우리나라 대기업은 핵심 첨단기술이 부족해요. 우리나라 R·D(연구개발) 지출은 세계 5위이고, GDP(국내총생산) 대비로는 이스라엘에 이어 두 번째로 높습니다. 그런데도 핵심 첨단기술이 없다는 건 연구(R)가 아니라 개발(D)만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외국에서 연구한 아이디어에 살을 붙여 제품을 개발한 것이죠. 이젠 우리도 개발에서 연구로 가야 합니다.”
“참 탐욕스러운 대기업”
그는 현재의 경제위기 탈출 해법을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 육성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동반성장’ 정책이 중요하다는 것.
“대기업으로 흘러갈 돈이 중소기업으로 흘러가도록 유도하기만 해도 현재의 경제위기는 생각보다 쉽게 풀릴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에 불공정거래가 일상화해 있습니다. 구두 주문, 어음 결제, 기술 탈취, 납품가 후려치기 등은 다른 나라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일본의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거래를 보면 본받을 게 많아요. 일본 기업에 납품하는 친구가 있는데, 가끔씩 알 수 없는 돈이 대기업으로부터 입금되기에 알아보니까 정부보조금이 나오면 그 돈을 납품업체들과 나누는 것이라고 합니다. 공정거래를 넘어 상생(相生)을 하는 거죠. 독일에서도 원자재 가격이 오르면 즉각 부품가격에 반영해 하도급업체 납품가격을 올려줍니다. 우리도 이런 상생 문화가 필요합니다.”
▼ 대기업 초과이익 공유제를 주장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
“초과이익의 상당부분이 하도급업체에 납품가를 후려치기한 결과입니다. 하도급업체가 허리띠를 졸라 가격을 낮췄기 때문에 대기업이 돈을 더 많이 번 것이니 같이 나누는 게 당연한 것 아닐까요.”
▼ 동반성장위원장 시절 추진한 ‘중소기업적합업종’ 선정에 대해 대기업들이 불만이 많은 모양입니다.
“1979년 이미 ‘중소기업 고유 업종’이 지정된 바 있습니다. 노무현 정부 때 없앤 걸 제가 ‘고유’를 ‘적합’으로 바꿔 살려냈습니다. 신청한 230여 개 업종 중에서 레미콘, 두부, 된장, 간장, LED조명 등 82개를 선정했습니다. 법적 강제성은 없지만, 국민이 지켜보니까 대기업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런데 요즘 대기업이 77개 업종을 풀어달라고 언론 플레이 하는 것을 봤습니다. 참 탐욕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 중소기업적합업종 선정으로 오히려 외국 대기업에 국내 시장을 내주게 됐다는 주장도 있던데요.
“LED조명 시장을 세계적 기업인 필립스가 잠식한다고 예로 드는데, 필립스코리아는 우리나라에서 저위기술로 만드는 LED조명을 팔지 않는다고 합니다. 중소기업에서만 만드는 게 효율이 조금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합업종 지정을 취소하면 중소기업은 다 망하고 양극화는 더 심해집니다. 그러면 경제가 더 활력을 잃고 사회불안, 사회파탄으로 이어져 결국 대기업도 망할 수밖에 없어요.”
▼ 동반성장위원장 할 때 일정 규모 이하의 공공발주는 중소기업만 입찰할 수 있도록 했죠.
“과거엔 대부분 대기업이 낙찰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낙찰받은 대기업은 중소기업에 다시 하도급을 줍니다. 중간에서 이윤만 남기는 거죠. 그래서 차라리 중소기업에 직접 주자는 것이었습니다. 중소기업이 크게 덕을 본다며 고맙다는 전화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는 “공정거래, 중소기업 보호, 지원을 통해 대기업으로 흘러갈 돈을 중소기업으로 흘러가도록 하면 중소기업이 그 돈으로 투자를 하고 생산을 늘리고 고용을 늘리게 된다. 그러면 직원 소득이 늘어나 소비 수요가 늘게 돼 경기침체를 완화하고 지속성장을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다.
“최저임금부터 올려야”
전 세계적으로 피케티 논쟁이 한창이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올해 출간한 저서 ‘21세기 자본’에서 “소득불평등이 확대되고 있는데, 경제성장률보다 자본수익률이 더 높은 게 원인”이라며 “부의 재분배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 책을 아직 다 읽진 않았지만 피케티의 연구 방법이나 지엽적인 부분이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 지금 전 지구적으로 불평등이 문제가 된다는 걸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것조차 인정하지 않는 것은 우려스러운 일입니다.”
미래학자 자크 아탈리는 “21세기는 이기적 이타주의 세계가 될 것”이라고 했다. IT기술이 발달한 21세기엔 누가 돈을 얼마나 많이 벌었는지, 그 돈을 어떻게 쓰는지 자세히 알게 된다. 이 때문에 부유층이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저항을 받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남을 돕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기적 목적으로 이타주의를 실현한다는 이야기다.
▼ 세계적으로도 양극화가 심각한 모양입니다.
“미국에서도 3년 전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는 운동이 벌어졌죠. 그런데 3개월쯤 지나면서 시위가 사라졌어요. 왜 그런가 했더니, 부자들이 시위를 의식해 기부를 많이 했기 때문이죠. 조지 소로스, 마이클 블룸버그, 워런 버핏, 빌 게이츠 등이 나서서 거액의 기부를 하고 동료 부자들에게도 기부를 독려하자 양극화에 대한 분노가 누그러진 거죠. 유럽은 이전부터 양극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고요. 그에 비해 우리는 아직 미흡합니다.”
▼ 우리나라 빈부격차는 얼마나 심하다고 보는지요.
“피케티의 말처럼 유럽이나 일본보다는 심하지만 미국보다는 덜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미국보다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미국은 유산상속으로 부자가 된 경우가 20% 정도고 나머지 80%는 자수성가를 한 사람들이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거꾸로 자수성가는 20%밖에 안 되고 상속 부자가 80%나 됩니다. 상대적 박탈감이 더 큰 거죠.”
▼ 소득불평등을 해소할 근본적인 방법이 있다면.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중소기업 임금이 대기업의 70~80%는 되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최저임금을 인상하는 게 효과가 있습니다. 내년부터 시간당 5600원 정도를 적용하도록 정해졌는데, 너무 낮은 수준입니다. 증세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 증세라면 부유세를 말하는 건가요.
“부유세를 만들기는 정말 힘듭니다. 누진세를 수정하자는 거죠. 누진세율을 더 확대한다든지, 과표 구간을 더 늘린다든지, 여러 방법을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념에서 실용으로
화제를 사회로 돌렸다. 세월호 침몰 등 어이없는 사건·사고, 지도층의 각종 추태와 비리들을 보며 ‘이게 정상적인 사회인가’ 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다.
“세월호 참사를 보며 세 가지를 떠올렸습니다. 하나는 우리 사회의 기초를 튼튼히 해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어느 위치에 있든 최선을 다해 일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고, 세 번째는 믿음의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노(老)변호사가 변호사가 된 아들에게 충고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사람은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추한 사람’ 3가지 스타일이 있다, 그런데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일단 좋은 사람으로 간주하고 대해라, 그러면 그 사람이 배신할 일이 별로 없을 뿐 아니라 좋은 사람이 되더라는 내용인데, 참 공감이 갔습니다. 일단 믿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봅니다.”
▼ 우리 현실은 이념대립까지 더해져 오히려 불신이 더 깊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제라도 작은 것부터 신뢰를 쌓기 위한 시도를 해야 합니다. 사목지신(徙木之信)이란 말이 있습니다. 중국 진(秦)나라 정치가 상앙이 세 길이나 되는 나무를 세우고 이를 옮기는 자에게 금 10개를 주겠다고 했지만 백성이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금 50개를 내걸었고, 한 사내가 나무를 옮기자 즉시 상금을 줘 거짓이 아님을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법을 공포했습니다. 새로운 법에 대해 백성의 불평이 많았습니다. 이때 태자가 그 법을 어겼는데, 상앙이 태자의 보좌관과 그의 스승을 처형하자 백성도 믿고 기꺼이 법령을 준수하게 됐다고 합니다. 지도자가 먼저 작은 일에서부터 믿음을 주는 게 필요합니다.”
▼ 정치권이 편 가르기를 부추긴다는 지적이 많은데요.
“조장을 하지는 않았겠지만 결과적으로 불신, 분열을 일으킨 면이 있다고 봅니다. 정치권에서부터 부정, 불의, 부패가 없어져야 합니다. 또한 이념 싸움으로부터 탈피해야 합니다. 오늘날 이념으로 싸우는 나라는 거의 없습니다. 사실 완전한 보수, 완전한 진보란 없습니다. 사안별로 어떤 것은 보수적일 수 있고 어떤 것은 진보적일 수 있는 거죠.”
인터뷰 중에 그가 한 말이 있다. 좌·우, 진보·보수의 이분법적 사고를 초월해 실용과 원칙을 지향하는 그의 생각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저는 어릴 적 미국이 원조한 옥수수가루로 아침엔 옥수수가루떡을, 저녁엔 옥수수죽을 먹으며 자랐어요. 그래서 미국을 비판할 수는 있지만 반미를 주장할 수는 없어요. 북한에 식량을 지원해야 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북한 주민의 마음을 사야 나중에 통일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무력통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정운찬 전 총리는 기존 정치권 후보들에 비해 깨끗한 이미지와 ‘경제전문가’라는 장점이 부각되며 2007년과 2012년 대선 유력 후보로 거론되곤 했다. 하지만 두 번 모두 출마를 공식화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게 정운찬의 한계”라는 말까지 나왔다.
“언론에서 추측하고 앞서나간 거지 제가 선거에 나간다고 군불을 땐 적은 없어요.(웃음) 2007년엔 국민이 제게 원하는 게 뭐였는지도 몰랐고요.”
정운찬 전 총리는 스승 조순 전 부총리(오른쪽)로부터 균형, 중용, 조화를 배웠다고 말했다. 동아일보DB
준비 안 된 대통령들
▼ 2012년엔 출마를 어느 정도 준비하지 않았나요.
“전혀요. 그해 2월 대통령에게 동반성장위원회 예산과 인력을 늘려야 한다고 두 번이나 이야기를 했는데 ‘알았다’고만 하더군요. 그만두란 이야기구나 싶어 그만뒀죠. 그리고 6월에 지금의 동반성장연구소를 만들었어요. 그걸 두고 말이 많았는데, 저는 뭘 계산하고 행동하는 성격이 못돼요.”
▼ 뜻을 펼칠 생각은 안 해봤나요.
“은사인 선생이 ‘나라 경제를 살릴 공부를 한 사람이 직접 해야지 남에게 맡기면 되냐’고 강하게 권유했는데, 정치란 게 쉽지 않더라고요. 내가 대통령감인가, 대통령으로 일할 준비가 돼 있나 생각해봤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준비가 돼 있었지만, 나머지 대통령들은 준비가 안 돼 있어 실패했다고 봅니다.
김 전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만난 적은 두어 번밖에 없지만 존경합니다. 제가 신문에 쓴 글을 보고 마음에 들었던지 한 번 본 일도 없는 제게 한국은행 총재, 청와대 경제수석, 금융감독위원장 등을 제안했습니다. 계속 거절했더니 그럼 강의라도 해달라고 해서 처음 만났습니다. 준비 안 된 대통령이 나라를 이끌면 국민을 피곤하게 합니다. 우리 국민의 저력은 어마어마합니다. 그걸 활용할 수 있는 준비된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2007년과 2012년 대선과 관련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묻자 허심탄회하게 들려주더니 ‘오프 더 레코드’로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처럼 그는 뭘 숨기거나 남을 속일 줄 모르고, 상대를 믿고 보는 게 몸에 밴 듯했다. 그게 직업정치인으로서는 단점이 됐는지는 모르지만 ‘인간’ 정운찬의 장점이 아닐까도 싶다.
▼ 지난 7·30 보궐선거 때도 새정치민주연합에서 동작을 출마 제의를 했죠.
“동반성장 일을 하기에도 너무 바빠 국회에 들어갈 여유가 없다고 사양했어요. 몇 번 더 찾아왔기에 ‘난 동작구에 살아본 적도 없다’고 했더니 ‘매일 동작구를 지나가잖아요’ 하더군요.(웃음)”
정운찬 전 총리는 동반성장이 양극화와 저성장을 해결할 대안이라고 강조했다. 동아일보DB
“동반성장은 내 사명”
▼ 앞으로도 정치권의 러브콜이 있을 법한데요.
“‘어느 자리에 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이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 번도 정치를 하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뭘 계획하고 도모하는 성격이 아니거든요. 살다보니 서울대 총장이란 책임이 주어졌고, 국무총리란 역할이 주어졌습니다. 지금 내게 주어진 사명은 동반성장 문화 조성과 확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걸 안 하면 우리 사회가 무너질 것 같아요. 누군가는 반드시 이 일을 해야 하는데, 제가 가장 적합하다고 봅니다.”
▼ 동반성장에 특별히 애착을 갖는 이유가 있나요.
“아버지가 아홉 살 때 돌아가셔서 정말 어렵게 자랐습니다. 초·중학교 시절 도시락을 먹어본 적이 없을 정도입니다. 중·고등학교도 진학할 처지가 아니었는데 3·1운동의 민족지도자 34인 가운데 한 분이라 불리는 스코필드 박사가 도와줘서 가능했습니다. 월세가 모자라 점점 산동네 꼭대기로 올라가는 어려움도 겪었고요. 스코필드 박사가 1960년대에 이미 ‘한국 사회는 빈부격차가 점점 심해질 것이다. 빈부격차 해소에 노력하라’며 제게 상대 입학을 권했습니다. 경제학과에 다니면서 조순 선생에게 배운 것도 균형, 중용, 조화였고요.”
▼ 만약 동반성장을 위해 일할 자리가 주어진다면.
“뭐든지 할 용의가 있습니다. 지난 6·4 지방선거 전에 박원순 서울시장이 ‘동반성장과 경제민주화를 위한 협약’을 맺자, 서울시 경제고문단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해왔습니다. 오해를 사기 딱 좋으니 선거 후에 이야기하자고 했는데, 선거가 끝나자마자 다시 제안을 하더군요. 고문단을 맡는 것은 생각할 수 없고, MOU(양해각서)만 맺었죠. 그러자 ‘정운찬이 새정치민주연합으로 갔다’는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여당 광역단체장과도 MOU를 맺어야겠어요.(웃음)”
‘首都 분열’의 부작용
▼ 이명박 정부 때 총리를 수락한 것도 동반성장, 양극화 해소를 위해서였나요.
“총장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개인적으로 이명박 대통령을 잘 몰랐어요. 2002년 서울대 총장이 되고, 그가 서울시장이 돼서 처음 만났죠. 전임 시장이 서울대 앞에 고가도로를 만들겠다고 해서 교수와 학생들이 크게 반대했어요. 그걸 지하화해달라고 건의하러 찾아갔죠. 이 시장은 이미 그때부터 큰 꿈이 있어서인지 대학에 장학금과 연구비를 많이 줬어요. 그 일로 몇 번 만났는데, 2006년 서울시장에 출마하라는 거예요. 서울을 국제금융도시로 만들고 싶은데, 금융전문가인 내가 적임자라고 생각한다면서. 국제금융은 저보다 어윤대 고려대 총장이 전문가라고 추천했더니 ‘아, 그럼 고대-고대잖아’ 하더라고요.
그 뒤에도 이런저런 자리를 맡아달라고 네댓 번 권했어요. 총리 제안이 왔을 때는 더 이상 사양하는 게 미안하기도 했고, 당시 북한 핵실험, 글로벌 금융위기, 양극화, 저성장 등 한국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겠다는 생각에 승낙했습니다.”
▼ 2009년 9월 총리에 취임한 후, 10개월 만에 자의 반 타의 반 물러났습니다.
“세종시 문제는 너무 안타까웠어요. 대통령 속마음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지명받을 때는 세종시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았어요. 제가 세종시 수정안을 국민투표에 부치자고 세 번이나 제안했어요. 그런데 스태프들이 국론이 분열된다느니, 국민투표에서 부결되면 그 순간 레임덕이 온다느니 해서 반대가 심하더군요.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국회에서 부결되면서 레임덕이 왔잖아요.”
▼ 지금도 세종시 이전은 잘못됐다고 생각하나요.
“역사적으로 볼 때 전 세계에서 수도가 나눠진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지금도 서울과 세종시로 나눠진 탓에 생기는 문제가 심각합니다. 장관들이 모여 차분하게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여유가 없어요. 같은 부처의 인사들이 한 시점에 한 장소에서 만나는 일도 드물죠. 지금이라도 재검토해야 합니다. 원점으로 되돌리는 방법도 있고, 청와대와 국회, 행정부를 전부 세종시로 옮기는 방법도 있어요. 둘 다 비용이 많이 들겠지만 잘 계산하고 국민의 의견을 들어 다시 판단해야 한다고 봅니다.”
▼ 총리 시절 꼭 하고 싶었는데 못해서 아쉬운 정책은 없나요.
“하나는 저성장, 양극화 해결을 위한 동반성장입니다. 좀 더 했더라면 구체적인 정책을 펼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교육 문제입니다. 한 나라의 교육정책이 대입과 관련한 ‘3불정책’(기여입학·본고사·고교등급제 금지)밖에 없다는 건 말이 안 돼요. 2009년 12월부터 8차례에 걸쳐 5시간씩 교육개혁에 관한 세미나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추진한 게 3화(化)정책이었습니다. 대학자율화, 고교다양화, 학력요건완화가 그것이죠. 그걸 좀 더 구체화할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때 학력요건 완화를 위해 규제를 287개 없앴습니다. 그 결과 고교만 졸업하고도 취직할 길이 넓어졌죠.”
聯政의 미학
▼ 우리 정치의 가장 큰 문제가 뭐라고 보는지요.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가 창의성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기 힘들고, 나와도 수용되기가 힘들어요. 이걸 살려줘야 하는 게 정치인데, 지금처럼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제왕적 대통령제에서는 그럴 틈이 없습니다. 조순 선생의 말처럼 의원내각제가 한 방법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현재 정치구조로는 누가 대통령이 되든 제왕적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 지금 같은 양당구도에서 내각제를 하면 서로 싸우느라 아무것도 못하지 않을까요.
“제3의 정당이 필요합니다. 2012년 제가 제3지대 연석회의를 만들자고 제안한 적이 있어요. 직접 연락한 것은 아니지만 박찬종 씨도 나오고, 안철수 씨도 나오고 이인제 씨도 나오라고 한 셈이죠. 거기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펼 장을 만들자는 제안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반응을 안 하더군요.(웃음)
정치 이념을 떠나 민생을 위한 제3의 정당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어느 정당도 과반 의석을 획득하지 못하는 다당제가 된다면 제1당은 제3당과 연정을 해야 하고, 그러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정책에 반영되지 않을까 합니다. 독일 등 유럽 선진국을 보면 연정을 하면서 다양한 아이디어를 수용하지 않습니까.”
조심스럽지만 단호한 그의 말을 들으며 머지않아 그가 정치권에 ‘개헌’과 ‘정계개편’이란 화두를 던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호열 기자 honeypap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