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혁신 ‘골든타임’ 2부]<3>안전 패러다임을 바꾸자 (上)국민도 정부도 말뿐인 안전
○ “나에겐 사고 일어나지 않아”… ‘낙관의 오류’
박 씨와 이 씨는 매일 아침 지하철을 타고 각각 직장과 학교로 향한다. 그러나 진단 결과 둘 다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 손잡이를 잡지 않았다. 박 씨는 “균형을 잡는 데 문제가 없는 데다 위생상 깨끗하지 않아 보여 손잡이를 잡지 않았다. 사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통제력 착각’과 ‘편향된 낙관’에 빠진 것이라고 진단했다. 정재희 서울과학기술대 안전공학과 교수는 “자신의 몸이 스스로 반응해 돌발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과 공공시설물에서는 사고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론이 안전의식을 둔화시킨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승강기안전관리원에 따르면 지난해 에스컬레이터와 승강기 등에서 발생한 사고는 총 88건으로 이 중 65건(약 74%)이 이용자 과실 때문인 것으로 드러났다.
12일 낮 12시 30분. 지하철에서 내린 이 씨는 횡단보도에서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선은 스마트폰에 고정돼 있었다. 그때 그의 옆에 다리를 꼰 채로 서 있던 남성이 횡단보도를 건너려는 듯 오른쪽 다리를 움직였다. 곁눈으로 이를 본 이 씨는 횡단보도로 발을 내디뎠다가 혼비백산했다. 승용차 한 대가 자신을 향해 돌진해오고 있었고, 신호등은 여전히 빨간불이었기 때문이다. 신호 변화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다 보니 남성이 교차된 다리의 순서를 바꾸려 한 것을 보행 움직임으로 착각한 것이다. 이 씨는 “평소에도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손기상 서울과학기술대 안전공학과 교수는 “보행 시 스마트폰에 집중하게 되면 주변 인지 능력이 상실돼 위급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이 상실된다. 안전을 위해 설치된 신호등을 무시한 것은 주위 소홀로 볼 수 있는데 언제든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이다”라고 분석했다.
○ 불씨 남은 꽁초… ‘용광로 쓰레기통’
“불을 내뿜는 쓰레기통이요? 많이 봤죠.” 이 씨와 박 씨의 진단표를 보면 ‘불씨가 남은 담배꽁초를 쓰레기통에 던지는 사람을 봤느냐’는 질문에 ‘목격’이라고 적혀 있다. 이 씨는 “학교 내에 흡연 장소가 있는데 친구들이 담배꽁초를 손끝으로 ‘톡톡’ 떨어낸 뒤 불씨를 확인하지 않고 쓰레기통에 던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불씨가 남았잖아’라고 친구에게 경고하고 나서야 친구는 침을 뱉어 불을 끈다”고 말했다. 이창우 숭실사이버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쓰레기통 안에는 불이 옮겨붙을 재료(휴지, 신문지, 종이컵 등)가 많기 때문에 화재 규모가 커지고, 확산 속도도 빨라 대형 화재가 발생할 위험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담뱃불 화재 실험’을 실시한 서울도봉소방서에 따르면 휴지가 들어 있는 쓰레기통에 담뱃불이 떨어지면 불과 3분 50초 만에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발화가 시작되는 것으로 조사됐다.
○ 안전 지키려는 노력은 불편하다?
박 씨와 이 씨는 퇴근길과 하굣길에서도 안전사고 가능성에 노출됐다. 이들은 술자리 등이 끝난 뒤 귀가를 위해 택시를 타고 지하철역까지 이동하는데 택시 뒷좌석에 탑승할 때 안전띠를 매지 않았다. 공통된 이유는 “짧은 시간 택시를 탔기 때문에 사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생각했으며 안전띠를 매면 답답하다”는 것이었다. 지난해 교통사고 통계에 따르면 안전띠를 매지 않았을 때 교통사고 치사율이 착용 시보다 4.1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까지는 고속도로와 자동차전용도로에서만 승차자의 안전띠 착용이 의무화됐지만 전문가들은 모든 도로에서 의무화가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설재훈 한국교통연구원 교통안전재난연구단장은 “뒷좌석에 앉은 탑승자의 전면에는 에어백이 없기 때문에 사고 발생 시 참사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본보-안전생활실천시민연합 조사… “안전 소홀, 빨리빨리 문화 탓” 34%
동아일보와 사단법인 안전생활실천시민연합이 ‘우리나라 국민의 안전의식 수준’에 대해 일반 시민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들이 생각하는 국민의 안전의식 점수는 100점 만점에 51.74점(평균)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조사에는 직장인과 대학생 등 523명이 참여했다. 정재희 서울과학기술대 안전공학과 교수는 “체계적인 안전교육의 부재로 인해 개인의 확고한 안전의식이 형성되지 못했음을 뜻한다. 또한 언론을 통해 대형사고 소식을 꾸준히 접하면서 ‘우리 사회가 안전하지 못하다’는 불안감을 갖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안전 문화가 자리 잡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179명(34.2%)이 ‘안전보다 경제발전이 우선시되는 문화’라고 답했다. 김일영 씨(30·회사원)는 “‘빠르게 일 처리를 해야 성공한다’는 생각이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다 보니 안전을 챙길 여유를 잃어버린 것 같다”고 말했다. 같은 질문에 178명(34.0%)은 ‘느슨한 단속과 솜방망이 처벌’이 원인이라고 응답해 당국의 규제와 단속 미비가 안전불감증을 부추기고 있다고 진단했다.
안전사고 유형 중 응답자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교통사고(277명·53.2%)였으며 화재(89명·17.2%), 산업재해(67명·13.0%)가 그 뒤를 이었다. 응답자 중 상당수는 안전사고 예방을 위한 노력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승용차 뒷좌석에 탈 경우 안전벨트를 착용하는가’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절반이 넘는 331명(63.3%)은 ‘아니다’라고 답했다. ‘영화관 등 다중이용시설 이용 시 비상구를 확인하는가’라는 질문에는 351명(67.1%)이 ‘확인하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정 교수는 “위험에 대한 인식이 선제적 예방활동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며 “반복적인 교육과 제도적 보완을 통해 안전수칙 준수를 습관화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윤철 trigger@donga.com·박성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