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혁신 ‘골든타임’ 2부]<3>안전 패러다임을 바꾸자 (上)국민도 정부도 말뿐인 안전
지난달 17일 판교 환풍구 추락사고가 난 뒤 국토교통부는 바로 다음 날인 18일 환풍구 관련 ‘특별점검’을, 20일에는 ‘긴급점검’ 공문을 연달아 지방자치단체에 보냈다. 특별점검은 안전사고가 우려되는 환풍구를 발견해 즉시 조치하라는 것이었고, 긴급점검은 환풍구 전수조사였다. 그동안 환풍구 설치 및 안전과 관련한 규정이 없었을뿐더러 얼마나 많은 환풍구가 있는지 정부가 몰랐던 탓이다.
조급했던 정부의 공문을 받은 지자체는 어떻게 움직였을까. 서울시는 환풍구 전수조사 공문을 국토부의 마감 시한인 지난달 24일 일선 구청에 보냈고, 이달 5일로 시한을 잡았다. 하지만 기한이 열흘 넘게 지났지만 아직 관련 자료는 ‘취합 중’이다.
그럼 점검은 제대로 이뤄졌을까. 서울의 A구청은 공문을 받은 뒤 주민센터 직원이 걸어 다니며 환풍구 현황을 파악했고 이를 바탕으로 구청 기술직 공무원들이 현장에 나가 환풍구 안전을 점검했다. 이 구청이 파악한 환풍구 500여 개 가운데 부적합 판정을 받은 것은 단 한 개. 구청은 서울시에서 내려온 ‘환풍구 전수조사 점검표’에 따라 건물명, 위치, 환풍구 재원, 개구 방향, 안전시설 유무 등을 기입하고 최종적으로 ‘적정’ ‘부적정’ 판정을 내렸다. 하지만 적정, 부적정을 판단하는 계량적 근거가 없어 일선 공무원의 주관이 좌우한다. 관내에 문제가 있는 환풍구가 많이 나오면 주민 불안과 불만이 높아져 점검자 스스로 엄격한 기준을 세우기 힘들다.
서울의 B구청은 더 황당했다. 판교 추락사고 다음 날부터 이틀 동안 토목과 직원들이 나가 지하철과 KT 시설물에 있는 환풍구를 자체 점검했다. 문제는 조치가 너무 빨랐다는 것. 서울시의 점검표가 내려오기 전에 점검을 실시했기 때문에 서울시가 요구한 점검사항과 차이가 있었다. B구청의 토목과 관계자는 “서울시에서 공문이 내려온 뒤 또다시 나가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서울시에는 관련 공문에 대한 답변을 보내지 않을 생각”이라며 “대신 자체 점검한 내용을 지하철공사와 KT에 보냈다”고 말했다.
○ ‘뚝딱’ 만들어진 가이드라인
그럼 환풍구 안전 규정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국토부는 사고 20여 일 만인 이달 6일 ‘환기구 설계·시공·유지관리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지하주차장 등의 환풍구는 높이 2m 이상으로 만들고 돌출된 부분은 위험을 감지할 수 있도록 내부가 보이게 지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다. 하지만 이 가이드라인은 법적 강제성이 없다. 국토부 건축정책과 관계자는 “판교 추락사고의 수사가 마무리되고, 환풍구 전수조사가 끝나면 환풍구 안전 관련 의무화 요건 등을 검토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선제적인 안전 관련법과 제도가 마련돼야 하지만 입법은 난항을 보인다. 16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이후 쏟아진 ‘안전 법안’은 139개나 되지만 통과된 것은 ‘4·16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 법안’ 등 5개에 불과하다.
꾸준한 제도 보완도 필요하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 이후 도입된 책임감리제도가 대표적이다. 민간감리업체가 공사 전반을 관리·감독하게끔 했지만 발주처가 책임 소재에서 벗어나 있어 공적 공사에서 공무원에게 면죄부를 주기 일쑤다. 지난해 7월 근로자 7명이 숨진 ‘노량진 수몰사고’와 관련해 7월 열린 항소심에서도 현장소장 및 책임감리원 등만 실형을 선고받았을 뿐 상수도사업본부 공무원은 1심처럼 무죄 판결을 받았다.
윤용균 세명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대형 사고가 나면 정부가 여러 인과관계를 폭넓게 따져 선제적 대책을 마련하는 게 아니라 그때그때 해당 사고에 임기응변식으로 대처하는 모습”이라며 “안전과 관련한 정부 차원의 태스크포스를 마련해 장기적이고 포괄적인 안전 대책 마련과 소요 예산 확보를 위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