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뉴스룸/변영욱]김기춘 메모와 대통령 사진

입력 | 2014-11-17 03:00:00


변영욱 사진부 차장

6일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의 메모가 국회 출입 사진기자 10여 명의 카메라에 포착되어 보도되었다. 예산결산위원회에 출석한 김 비서실장은 이날 야당 의원들로부터 4월 세월호 침몰 사고 당시 대통령의 7시간 행적에 대한 추궁과 함께 헬스 장비 구입 등에 대한 질의를 받았다. 이에 대한 예측을 이미 했었는지 비서실 직원 한 명이 김 실장에게 다가가 4∼6줄가량의 메모가 쓰인 흰색 종이 한 장을 건넸다. 메모지를 본 김 실장은 노란색 노트를 꺼내 살을 붙이기 시작했다. 10여 m 떨어진 2층에서 카메라의 셔터와 플래시 세례가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대통령의 운동기구 등은 대통령의 안위와 경호와 관계되고 대통령의 안위는 국가안보와 직결되는 사항이며 따라서 외국뿐만 아니라 역대 정부도…양해”라는 내용이었다. 김 실장과 청와대의 답답한 마음이 모두 들어가 있었다. 그래서 사진기자들의 존재를 알고 있던 김 실장이 의도적으로 메모를 노출시킨 것일 수도 있다는 게 현장 기자들의 대체적 반응이었다.

국가와 대통령에게 보안과 안위에 대한 중요성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미국과 영국에서 한국 기자들이 그 나라 대통령이나 총리를 만나려면 두세 시간 전부터 샅샅이 짐 검사를 받는다고 한다. 카메라 장비 자체가 위험 요소이고 사진이 위험 요소가 될 수도 있다.

특히 우리나라 대통령 사진에는 분단국가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다. 대통령은 군사 지도자로서의 역할도 부여받았다. 촬영은 공격으로 인식된다. 영어에서도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행위를 ‘슛(shoot)’이라고 표현한다. 청와대 상공에 무인 촬영 장비인 드론이 떠다녔다는 사실에 국민들이 경악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대통령의 일정에 대해 취재 불가 조치가 많아도 사회적으로 크게 문제를 안 삼는 분위기다. 분단국가라는 특수성 때문에 한국의 대통령 사진은 아직까지 통제의 대상이다. 전직 대통령들도 이런 관행을 따랐지만 이제는 관행에서 조금씩 빠져나와야 할 때이다.

이미지는 국경을 넘어 전 세계로 간다. 국민들은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 국가 지도자들의 일정을 보고 있다. 프랑스 엘리제궁 홈페이지에는 대통령의 주간 일정이 미리 나와 있고 자동차 수리공의 인터뷰까지 공개되어 있다.

통제와 비밀주의만으로 현재와 같은 영상 시대를 살아갈 수 있을까. 보여주는 것에 주저하기보다 제대로 보여줘야 하는 시대가 아닐까? 헬스 하는 대통령, 산책하면서 바람에 머리카락이 흐트러지기도 하는 대통령의 모습은 어떨까? 청와대 비서관들은 논리를 정당화하는 계산뿐 아니라 국민들에게 어떤 이미지를 보여줄지 고려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10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에서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중국 시진핑 주석을 만났다. 시진핑은 중국이 만든 와인을 준비했고 오바마는 화이트와 레드 와인을 한번씩 맛보는 모습을 카메라 앞에서 연출했다. 세계에 자국 와인을 자랑하고 싶은 중국의 감정을 배려한 것이다. 세계 지도자들의 사진은 그렇게 만들어져 가고 있다. 우리도 그렇겠지라고 믿고 싶다.

변영욱 사진부 차장 cu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