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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공원’ 만들테니 검토해 봐라

입력 | 2014-11-17 03:00:00

[말이 세상을 바꿉니다/잊지 못할 말 한마디] 한국고전번역원장 이명학의 부친




이명학 한국고전번역원장

선친의 고향은 평양이다. 광복 후 17세 때 대학 진학을 위해 혈혈단신 서울에 오셨다가 6·25전쟁으로 가족들과 영원히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객지생활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다행히 정부에서 미국 연수를 보내주어 귀국 후 한때 육군군수학교에서 재무관리 분야의 교수를 하다가 사회에 나와 작은 사업을 시작하셨다. 사업자금을 도와줄 사람이 없으니 그야말로 적수공권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으셨다. 어찌 되었든 1980년대 새로 시작한 오폐수를 처리하는 탈수기 제작 사업이 환경 문제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이 높아지면서 형편이 조금 나아졌다. 당시 누가 땅을 좀 사두라고 권하면 “다 사정이 있어서 내놓았을 텐데 나중에 땅값이 오른 것을 알면 그분 마음이 얼마나 안 좋겠느냐”며 생전에 땅 한 평 사지 않으셨다.

그러던 어느 날 나를 부르시더니 서울 근교에 ‘효(孝)공원’을 만들어야겠으니 검토해 보라는 것이었다. 선친은 분단으로 부모님께 평생 효도 한 번 못했으니 이렇게 해서라도 부모님에 대한 죄송함을 달래려는 마음이셨던 것 같다.

하지만 이 공원을 채울 마땅한 콘텐츠가 없었다. 효에 관한 한문 구절을 강의할 수도 없고, 그런 글귀를 벽에 써서 늘어놓을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효에 관한 옛이야기를 매번 강의할 수도 없었다. 이리저리 궁리 끝에 어려울 것 같다는 말씀을 드리니, 그러면 ‘효 애니메이션’을 만들자고 하셨다. 아이 한 명이라도 이것을 보고 효에 대해 느끼면 좋겠다고 하면서 초등학교 3학년 이전 학생들이 볼 수 있는 수준으로 하자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이유를 여쭈니 3학년 이전 정도가 되어야 애니메이션을 보면 느끼는 것이 있을 것이고, 인성교육은 어려서부터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이었다. 알고 지내던 분이 EBS에 있어 찾아가 상의를 하니, 이런 일을 개인이 해서는 안 되고 국가가 도와야 한다며 교육부와 EBS가 같이 제작하자고 했다. 그러나 추진이 그리 쉽지 않아 독자적으로 하려고 알아보니 당시 1시간 분량의 애니메이션에 제작비만 십 수억이 든다는 것이다. 아쉽지만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흘러 3년 전 평소 건강하시던 선친이 갑자기 큰 병을 얻으셨다. 상황을 보니 견뎌내시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세상을 떠나기 10여 일 전쯤 선친께 그전에 하려다 못한 ‘효 애니메이션’을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여쭈니 환한 표정을 지으며 매우 좋아하셨다. 선친이 돌아가신 후 바로 이 일에 착수했다. 제작업체와 긴밀하게 상의하면서 1년여 끝에 ‘소년어사 출두야!’라는 효와 신의를 주제로 한 1시간 분량의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선친 생전에 만들지 못한 것이 한스럽기는 하나 유지를 받들어 전국 6700여 개 초등학교와 소년원, 교도소, 해외 한국문화원에 무상으로 보급했다. 지금도 이 애니메이션을 보고 선친 말씀대로 부모님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학생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선친의 소중한 뜻이 작게나마 실현된 것이 아니겠는가.

이명학 (한국고전번역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