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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한국 드라마 실시간으로 보고있는 평양주민들

입력 | 2014-11-18 03:00:00


북한에서 인기리에 팔리고 있는 중국제 MP4(노트텔). 정전이 돼도 배터리로 영화 한두 편을 볼 수 있는 데다 CD와 USB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다. 가격은 100달러 전후다. 주성하 기자 촬영

주성하 기자

한국에 처음 와서 밤늦게까지 독수리 타법으로 타자 연습을 하던 때가 어제 같은데 벌써 12년이 흘렀다. 방에 틀어박혀 혼자 인터넷을 배운다고 씨름하다 컴퓨터가 다운된 날에는 멀리 보이는 ‘컴퓨터 크리닝’이란 간판을 용케 찾아내 배낭에 본체를 둘러메고 찾아가기도 했다. ‘컴퓨터를 청소해주는 곳’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빨래만 잔뜩 걸려 있어 이상하다 싶었다. 하지만 세탁소일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못하고 사장에게 기어코 메고 온 컴퓨터를 고쳐 달라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난다. 첫 휴대전화를 중고폰으로 구입한 날에는 사용법을 익히느라 밤을 새웠다. 그때 나는 흡사 타임머신을 타고 30년 뒤 미래 세계에 뚝 떨어진 사람 같았다.

그래도 지금은 타자가 일상인 기자란 직업을 얻었고, 빠르게 변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흐름에도 올라타 방문자가 6200만 명이 넘는 블로그도 운영하고 있으니 타임머신 타고 온 것치곤 잘 적응한 것 같다. 하지만 최신 변화를 따라가긴 여전히 숨 가쁘다.

요즘 북쪽을 건너다 보면 저쪽은 나보다 더 정신없는 것 같아 안쓰럽다. 보위부 쪽 이야기를 전해 들으니 돌아버릴 정도라 한다.

내가 북에서 살 때는 비디오테이프 플레이어만 있어도 부잣집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북한에서도 액정표시장치(LCD) TV, 스마트폰, 태블릿PC를 어렵지 않게 살 수 있으니 북쪽 사람들은 최근 10여 년 새 30년을 훌쩍 건너뛴 셈이다. 밀려드는 첨단 기기의 홍수 속에 보위부가 수십 년 쌓아 왔던 통제 노하우도 물거품처럼 밀려가고 있다.

2000년대 초반 CD 플레이어가 북한에 급속도로 퍼져 한국 드라마를 빠르게 확산시키자 보위부는 집집마다 다니며 CD 플레이어에 검열 딱지를 붙이기에 바빴다. 급기야 2004년 ‘109상무’라는 불법 동영상 단속 전담 특수조직을 만들고 몇 년 뒤엔 ‘109연합지휘부’란 거창한 이름으로 승격까지 시켰다.

2005년 이후 CD와 휴대용 저장장치(USB)를 동시에 쓸 수 있는 데다 배터리가 장착돼 전기가 없어도 동영상을 볼 수 있는 MP4(일명 노트텔)가 퍼지자 보위부엔 비상이 걸렸다. 증거를 잡기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CD룸엔 북한 영화를 넣고, 한국 영화는 USB를 꽃아 보다가 단속반이 뜨면 USB를 숨기고 북한 영화를 보았다고 우겨댔다. 이걸 단속하느라 정신없는 사이 요샌 더 골치 아픈 MP5라는 태블릿PC와 유사한 기기가 새롭게 등장했다. 이 기기에 장착되는 마이크로SD칩은 영화 수십 편을 저장할 수 있지만 손톱만 한 크기여서 최악의 경우 삼켜버리면 된다.

스마트폰과 태블릿PC에 익숙한 젊은 세대는 아예 블루투스 기능을 활용해 동영상이나 불륜 소설을 서로 전송해 주고받는다. 단속에 걸릴 것 같으면 삭제해버리면 그만이다.

보위부는 흘러간 과거가 그리울 것이다. 옛날엔 어쩌다 전기가 들어온 아파트 단지에 불시에 쳐들어가 전기 차단기를 내리고 집집마다 뒤지면 됐다. 한국 드라마를 보던 사람들은 멈춘 기기에서 테이프나 CD를 꺼낼 수 없어 꼼짝 못하고 잡혔다. 하지만 지금은 확실한 심증을 갖고 몸수색을 해도 증거물을 찾기 어렵다. 김정은이 스마트폰 생산을 독려하는 세상인지라 최신 기기를 무작정 빼앗겠다고 선포하기도 쉽지 않다. 그랬다간 보위원의 자식들부터 반동이 될지 모른다.

결국 보위부는 대세에 굴복해 최근 노트텔 사용을 합법적으로 인정하고 말았다. 올 10월 초까지 집집마다 다니며 조사를 한 뒤 승인된 기기만 쓰라고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사람들이 노트텔 2대를 구입해 하나만 승인 받고, 하나는 숨겨놓고 몰래 본다면 방법이 딱히 없다는 것쯤은 자기들도 안다. MP5도 지금은 무조건 몰수하지만 나중엔 결국 노트텔처럼 사용이 허용될 것이다.

고위 간부들부터 앞다퉈 구매하는 LCD TV도 정말 골칫거리다. 평양에서 한국 방송을 직접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까지 평양에서 살다 온 탈북자는 한국 방송을 집에서 봤다고 했다. 보위부 전파감독국 사람들은 남쪽에서 강한 출력으로 TV 전파를 쏘고 있어 막기 어렵다고 하소연한단다. 북한은 평양 주변에 안테나를 여러 곳에 세우고 시내를 향해 강한 방해 전파를 쏘고 있지만 잦은 고장과 전력난 때문에 방해 전파를 쏠 수 없을 때가 많다. 반면 평양엔 거의 모든 집에 축전기가 다 있다. 국가엔 막을 전기가 없지만, 개인에겐 몰래 볼 전기가 있는 것이다.

평양도 막기 어려운 판이니 남포를 비롯한 서해안 지역에선 한국 TV를 얼마든지 볼 수 있다. 특히 통제에도 불구하고 인기리에 밀매되는 휴대용 LCD TV를 갖고 산에 오르면 맘 편히 한국 TV를 볼 수 있다.

북한에서 볼 수 있는 한국 채널은 KBS를 위주로 SBS, MBC 프로그램이 두루 섞인 것이라 한다. 삐라에 거품을 무는 북한이 TV 송출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이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한국 정부가 삐라도 못 막아준다고 하는 판이니 어차피 말해봐야 본전도 못 찾을 것이라 판단한 걸까, 아니면 이런 프로그램 정도는 양호하다고 판단한 걸까. 만약 북한에 채널A의 ‘이제 만나러 갑니다’와 같은 프로그램을 송출한다면 그래도 침묵을 지킬 수 있을지 정말 궁금하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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